화를 다스리는 바느질멍
오늘도 사춘기 아들에게 의문의 1패를 당했다.
끓어오르는 심장의 열기와, 버벅거리는 머릿속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 원단을 펼쳐 본다.
머릿속으로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말들이 끊임없이 꼬리를 물지만, 왜 요녀석앞에서만은 입안에 왕사탕 하나 물고 있는 마냥, 말이 퍼뜩 퍼뜩 나오지 않고 버벅대는지.. 그 사이 요 녀석은 입에 참기름이라도 발랐을까, 말도 안 되는 이론으로 자기의 주장과 고집을 똘똘 뭉쳐 돌직구를 쉴 새 없이 날린다. 이성적으로도, 속도전으로도 참패 당해 이래저래 속상하고, 아픈 날이다.
이런 날은 뭐라도 만들며 머리와 가슴속 끓어오르는 울화를 식혀야 한다. 바로, 바느질멍이 필요한 순간이다.
옷을 만든다는 건 단순히 천과 실을 엮는 일이 아니라, 작은 조각조각의 시간을 꿰매어 나만의 내면을 치유하는 시간인 것도 같다.
'그래 상황은 웃프지만, 네가 아픈 것보다는, 내가 아픈 게 낫다!'
라고 스스로를 토닥이며, 펼쳐진 원단을 바라본다. 네이비 컬러에 잘게 찍힌 도트 무늬와, 하단으로 내려갈수록 짙어지는 아이보리 플라워 패턴이다. 이 원단도 언젠가 아들 녀석의 화를 받던 날! 동대문으로 달려가 사서 쟁겨뒀던 것이다. 무늬가 첫눈에 보고 반할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다. 잘 만들어진 원단을 볼 때면 마치 한 폭 그림 같은 느낌이다. 꽃잎인 듯 나뭇잎인듯한 흰색의 화사한 무늬들을 보고 있노라니 아들하고 언제 다퉜나 싶게 싹 잊고, 갑자기 기분이 급상승해서 사가지고 왔던 기억이 있다.
'병 주고 약 주고 다하네...'
이런 무늬들의 포인트는, 패턴의 배치를 상호대칭 잘 맞추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그것마저도 시간의 공든 탑을 쌓으면 될 터이다.
자와 초크로 패턴을 그리고, 재단 가위로 조심조심 자른다. 여름용으로 시원한 흰색 시폰을 안감으로 넣었다. 매끄럽고 시원한 느낌이 좋다. 가장 어려운 부분인 네크라인과 콘솔지퍼 부분이 실패하지 않도록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 박음질 선이 고르고 가지런하게 나오도록 조심조심 재봉틀의 장력을 조절해 본다. 항상 원단의 두께나 시접의 상황에 따라 재봉틀의 컨디션이 달라지기 때문에, 기계치인 나에겐 늘 어려운 일이다. 매 번, 할 때마다 헤매지만, 또 만들어 놓고 보면 뿌듯한 기쁨이 있다.
마침내, 나의 취향과 계획이 반영된 나만의 옷이 완성되었다. 나만의 호흡으로 완성한 옷은 그야말로 소확행 그 자체이다. 덤으로 옷을 만드는 동안, 수없이 나누는 스스로와의 우문현답은 결국 스스로를 위로하고, 아이와 나의 삶의 속도를 조율하고 중재하는 데 큰 몫을 담당하기도 한다. 당연히, 오늘을 살아가는 나를 한층 단단하게 해주는 활력소가 된다.
이 번 옷은 그동안 만든 것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힐 만큼 완성도가 높아 마음에 든다. 그래서 주로 전시회나 모임에 입고 가기에도 그만이다. 만든 건 줄 아무도 모른다. 이제는 알 수도 있으려나....
다 만들고 났는데, 한 마정도 원단이 남았다. 그래서 고무줄 밴드 롱치마 만들었다. 좀 다른 느낌으로, 이번엔 안감을 검은색으로 넣어 보았다. 아이보리 무늬가 돋보인다. 흰색과는 다른 게 차분한 느낌이다. 배색이 달라지면 느낌도 달라진다. 이건 동생에게 선물로 택배 보냈다.
한 벌의 옷이 완성되는 동안, 울그락 붉으락 정점의 화는 사그라들고 없다. 사춘기 아들의 화를 받아, 갱년기 화로 풀지 않은 것도 다행이다 생각되고, 덕분에 수행하는 마음으로 옷 한 벌도 지었으니 감사한 생각도 든다.
그렇게 화를 잊고,
다시 또 함께 밥 먹고, 사소한 일로 또 투닥거리고, 바느질멍하며 철들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