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은 유방암 수술을 한다고 하면 전날 입원해서 수술 후 다음 날 퇴원시킨다. 오직 2박 3일 입원만 가능하다. 처음 유방암에 걸렸던 10년 전에는 의사의 재량에 따라 입원 일수의 제한이 없었다. 대부분 조직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1주일에서 열흘 정도 입원시켜 주었다.
형부가 오셨다. 형부는 수술을 기다리면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셨다. 처음 수술에 들어가기 전에, 수술 시간이 2시간 이상 걸릴 거라고 말씀하셨다. 보호자는 식사나 다른 볼일 보고 오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수술은 30분도 지나지 않아 끝났으며, 교수님께서 먼저 나오셨다고 했다. 교수님은 내 암 덩이를 가지고 나와서 형부에게 보여주면서 수술이 생각보다 쉬었다고 했단다.
가슴을 볼 수 없는 나는 궁금했다. 어느 정도 어떻게 절제가 되었는지? 현재의 내 가슴 모양이 어떤지 궁금했지만, 수술 브라를 절대 열지 말라고 했다. 하루 이틀 지나자, 가슴을 보여주었다. 깜짝 놀랐다. 원래 가슴도 작았지만, 생각한 만큼 절제하지 않았다. 가슴 모양이 그대로 있었다. 수술 자국만 5센티 정도 있었다. 내가 생각한 전절제가 아니었다.
담당 주치의가 오후에 회진왔을 때, 물어보았다. 주치의 말로는 초음파에 있었던 잔 암들이 다 사라지고 암도 발견 당시보다 작아졌으며, 림프에도 전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들도 좀 놀랬다고 했다. 나는 감사했다.
마음이 편해졌다. 그때부터 나의 본 성격이 나왔다. 친화력이 좋은 나는 병실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유경험자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었다.
머리 아픈 정도가 점점 심해졌다. 간호사실에 가서 영양제를 부탁했다. 영양제를 맞는 도중 갑자기 쇼크가 왔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점점 심해지는 두통과 어지러움으로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주치의에게 “어지러움이 점점 심해져서 생활이 안 되고 속도 메스껍고 죽겠네요. 머리가 터져버릴 거 같아요. 유방암이 문제가 아니네요. 이런 경우, 어떻게 해요?”라고 묻자, 주치의는 알아보겠다고만 하고 두통약만 주었다.
다음날도 머리가 쪼개지면서 칼로 쑤시는 것 같은 두통을 호소하자, 주치의는 “제가 알아봤는데 그건 시간이 지나면 나을 수 있데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얼마나요? 이제 곧 집에 가야 하는데.,,”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알 수 없어요. 제가 아는 서울대 의사 선생님께서도 두통을 호소하셨지만, 방법을 못 찾고 낮엔 일하고 밤에는 병원에서 쉬셨어요. 하루 만에 나을지, 한 달이 될지, 일 년이 될지 정말 10년이 될지 사람마다 달라서 아무도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아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황당함과 절망을 동시에 느꼈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저 퇴원해서 집에 가면 아이가 초등 1학년이에요. 어린아이 앞에서 엄마가 아프면 안 돼요.”라며 웃으면서 심각하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주치의가 말하기를,
“뇌를 뽀개봐야 알아요. 그러면 죽어요.”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거기서 어떤 대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수치로도 기계적인 검사로도 알 수 없는 무언의 고통과 통증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어린 자식들이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아픈 몸으로 집에 가면 절대로 안 되는데? 곧 나올 검사 결과는 어떻게 나올까? 아이들은 잘 있을까?’ 많은 걱정이 몰려오는 밤시간이 힘들었다. 가능한 부정적인 생각들을 하지 않기 위해 시간 나는 데로 유방암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루하루가 피가 마르는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20231013
가슴을 볼 수 없는 나는 궁금했다. 어느 정도 어떻게 절제가 되었는지? 현재의 내 가슴 모양이 어떤지 궁금했지만, 수술 브라를 절대 열지 말라고 했다. 하루 이틀 지나자, 가슴을 보여주었다. 깜짝 놀랐다. 원래 가슴도 작았지만, 생각한 만큼 절제하지 않았다. 가슴 모양이 그대로 있었다. 수술 자국만 5센티 정도 있었다. 내가 생각한 전절제가 아니었다.
담당 주치의가 오후에 회진왔을 때, 물어보았다. 주치의 말로는 초음파에 있었던 잔 암들이 다 사라지고 암도 발견 당시보다 작아졌으며, 림프에도 전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들도 좀 놀랬다고 했다. 나는 감사했다.
마음이 편해졌다. 그때부터 나의 본 성격이 나왔다. 친화력이 좋은 나는 병실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유경험자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게 되었다.
머리 아픈 정도가 점점 심해졌다. 간호사실에 가서 영양제를 부탁했다. 영양제를 맞는 도중 갑자기 쇼크가 왔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점점 심해지는 두통과 어지러움으로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주치의에게 “어지러움이 점점 심해져서 생활이 안 되고 속도 메스껍고 죽겠네요. 머리가 터져버릴 거 같아요. 유방암이 문제가 아니네요. 이런 경우, 어떻게 해요?”라고 묻자, 주치의는 알아보겠다고만 하고 두통약만 주었다.
다음날도 머리가 쪼개지면서 칼로 쑤시는 것 같은 두통을 호소하자, 주치의는 “제가 알아봤는데 그건 시간이 지나면 나을 수 있데요.”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얼마나요? 이제 곧 집에 가야 하는데.,,”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알 수 없어요. 제가 아는 서울대 의사 선생님께서도 두통을 호소하셨지만, 방법을 못 찾고 낮엔 일하고 밤에는 병원에서 쉬셨어요. 하루 만에 나을지, 한 달이 될지, 일 년이 될지 정말 10년이 될지 사람마다 달라서 아무도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아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황당함과 절망을 동시에 느꼈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저 퇴원해서 집에 가면 아이가 초등 1학년이에요. 어린아이 앞에서 엄마가 아프면 안 돼요.”라며 웃으면서 심각하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주치의가 말하기를,
“뇌를 뽀개봐야 알아요. 그러면 죽어요.”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거기서 어떤 대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수치로도 기계적인 검사로도 알 수 없는 무언의 고통과 통증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어린 자식들이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아픈 몸으로 집에 가면 절대로 안 되는데? 곧 나올 검사 결과는 어떻게 나올까? 아이들은 잘 있을까?’ 많은 걱정이 몰려오는 밤시간이 힘들었다.
가능한 부정적인 생각들을 하지 않기 위해 시간 나는 데로 유방암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루하루가 피가 마르는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2023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