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의 애착도마 위에 얇게 썰린 하얀 양파
앳된 얼굴로 "안녕하세요"란 인사를 예쁘게 하는 그녀는 이 빵집에 처음 왔다고 했다. 나는 쟁반과 집게를 건네주며 반갑다 말했다. 워킹홀리데이로 와서 2달이 지났는데 벌써 한국이 그리워 이 빵집을 구글 맵으로 찾아 버스를 타고 왔다고 했다. 한국식당에 가서 한국음식을 먹고 싶지만 워홀러가 한 끼 먹기에는 가격부담이 크고 한국 빵집에서 빵 몇 개 사서 평일 끼니로 먹을 거란다. 워킹홀리데이로 하는 일도 있을 텐데 피곤하게 버스까지 타고 올 필요 없이 너무 멀지 않은 곳이면 배달서비스도 있으니 이용해 보라고 알려줬다. 그러나 한국 빵집 냄새가 맡고 싶어 머지않아 다시 오겠다고 했다. 그녀가 골라온 빵을 보니 밤식빵에 고구마빵, 마늘빵 등 요즘 애들이 말하는 할미 입맛인 듯 했다. 나는 계산해 주다 말고 홀에서 단팥빵 두 개를 가져와 봉투에 넣어주며 서비스라고 굶지 말고 건강 챙기며 지내라고 했다.
그녀가 빵집을 나간 뒤 앞치마 앞주머니 휴대폰의 케이스에 들어있는 내 카드를 꺼내 단팥빵 두 개 값을 직접 결제했다. 새 손님이 온 것도 아닌데 계산대 포스기 소리가 나서 의심이 들었는지 작업장에 있던 사모님은 계산대로 나왔다. 손님이 왔냐 묻는 사모님께 아까 그 워홀러 손님의 단팥빵 두 개를 내가 사줬다고 하니 나를 보고 부자 납셨다고 혀를 끌끌 찬다. 내가 미쳤나 보다. 사모님의 저 반응마저 예상했고 심지어 속 좁기가 종지 같은 그녀가 귀여워 보이기까지 한다.
내가 출근해서 일을 하고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항상 보행 보조기를 의지해 빵집으로 들어오시는 키위(뉴질랜드 사람) 할머니가 계신다. 백발을 곱게 빗어 넘긴 할머님께 오늘 기분은 어떠신지, 입고 계신 블라우스가 너무 잘 어울린다는 기분 좋은 인사를 건넨다. 할머니는 늘 하와이안 피자빵을 고르시는데 양파가 들어있지 않아 내가 그 빵을 팔면서도 미안하지 않다. 가끔 할머니가 슈가파우더가 솔솔 뿌려진 생크림 소보루를 사가시려고 하면 나는 얼른 빵 케이스로 가서 제일 뒤에 있는 새 빵을 꺼내 드린다. 내가 빵집에 있는 4시간만이라도 손님들께 좋은 서비스를 하고 싶다. 할머니가 보조기를 가지고 편히 나가 실 수 있게 할머님보다 내가 앞장서서 나와 빵집의 문을 열어드리는데 사모님은 이런 내 모습도 탐탁지 않아 한다.
아침부터 햇살이 쎄서 빵이 쉴까 염려되어 창의 블라인드를 내릴 겸 홀에 나갔다가 양갈래 머리를 한 3살 정도의 귀여운 아이가 엄마 손을 꼭 붙잡고 신난 발걸음으로 빵집을 향해 오는 것을 보았다. 어서 오라며 문을 열어주고 인사하니 쫑알쫑알 말을 한다. 아기와 함께 들어온 아기엄마는 빵집 주인이 바뀌었냐고 물었다. 빵을 사려고 딸과 함께 들어왔다가 딸아이가 덩치 큰 남자분을 보고 무섭다고 징징거려 빵을 못 사고 나갔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도 빵집을 슬쩍 보고 마트로 가려다 내가 보여 딸과 같이 들어왔다고 했다. 아기가 무서워하던 덩치 큰 남자는 빵집 사장님의 아들이라 말할 필요가 없기에, 빵집 사장님은 바뀌지 않았고 내가 파트타임으로 오전에 있으니 언제든 오시라고 했다. 아이는 작은 생크림 케이크를 사달라 했고 다행히 오늘은 케이크 언니가 출근해 작업대에서 주문받은 케이크 작업이 막 끝나고 있으니 마트 장보고 나오시는 길에 새로 만든 케이크를 픽업하는 게 어떻겠냐 물었다. 애기엄마는 기분 좋게 결제하고 1시간 뒤에 오겠다고 했다. 케이크 언니에게 작은 생크림 케이크 하나 만들어달라고 하니 다 들었다고 장사수완이 좋다고 엄지 척을 해준다. 기분 좋게 돌아서려 하자 사모님은 제 발로 사 먹으러 온 손님에게 케이크 하나 판 게 뭔 장사수완이냐며 나를 또 후려친다. 귀엽다 귀엽다 사모님 참 귀엽다. 무엇이든 깎아 내리지 못해 안달 난 귀여운 사모님은 귀도 밝고 눈도 좋다. 사모님이 뭐라 한들 케이크 언니와 나는 아무 대꾸도 안 한다. 욕만 안 할 뿐 나도 케이크 언니처럼 변해가고 있다.
둘째를 임신해서 슬픈 뒤끝을 갖고 살아온 세월이 있어서 그런지 세상의 모든 임산부에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 생명을 품고 하루가 다르게 커나가며 내 몸속 장기들을 짓누르는 뱃속 작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 우리 엄마들은 얼마나 큰 노력과 희생을 하는가. 막달이 되면 자는 것도, 먹는 것도, 걷는 것도 숨 쉬는 모든 시간이 힘에 겨워 차라리 출산을 빨리 해 무거운 배가 꺼지고 무릎과 허리의 통증이 가시기만을 바라는걸 누구보다 잘 안다. 그 마음을 아이 둘 엄마인 내가 너무나도 잘 알기에 괜한 오지랖인 줄 알지만 임산부에게 한번 더 마음이 쓰이고 눈길이 간다.
빵집에 핑크색 시폰 롱치마를 입은 임산부가 혼자 들어왔다. 그리 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이마가 반짝이는 것을 보니 외출을 해 땀이 났나 보다. 티슈를 가져다주며 날이 많이 더워졌다고 말을 붙였다. 그녀는 임신 8개월이고 첫 아이라 더 힘들다고 했다. 아이 갖기 전에는 야채를 입에도 안대는 육식파였는데 희한하게 아이를 갖고 나서는 고기보다는 야채가 좋아 양파가 들어있는 빵이 입에 맞는다고 했다. 그래서 양파빵과 피자빵, 마늘크림이 들어있는 빵을 사러 왔다고 했다.
양파빵...
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매일같이 곰팡이 핀 도마를 바꿔야 한다고 잔소리를 하는 내 말은 무시한 채 사모님은 여전히 그 도마에 양파를 얇게 썰어 매일 양파빵을 만든다. 그래도 개선된 딱 한 가지, 양파는 화장실에 보관하지 않는다. 빵 위에 얇게 썰려 올려진 양파는 곰팡이 도마에서 썰려진 줄 아무도 모른다. 그 누구도 먹지 않았으면 하지만 특히나 내가 알고 있는 이상 임산부에게만큼은 그 빵을 직접 팔 수없다.
어깨가 아프다는 사모님은 빵의 속재료들을 씻어 준비하고 다져놓는 일을 나에게 모두 맡겼다. 다행히 나에게는 새 도마가 주어졌고 피자빵과 고로케의 야채들을 다지는 일은 새 도마에서 깨끗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양파빵만큼은 사모님의 곰팡이 핀 애착 도마에서 준비되었기에 팔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임산부 손님에게 다른 빵을 권했다. 지금 갓 튀겨져 나온 고로케가 요즘 잘 나간다고 당근과 양파, 부추를 듬뿍 다져 넣어 맛도 좋다고 호들갑을 떨며 적극 어필했다. 다행히 그녀가 들고 있는 쟁반에는 양파빵이 빠지고 고로케가 담겼다.
미안합니다. 양파빵을 못 사가게 해서 미안합니다.
난 얼마나 더, 빵집에 들어오는 손님들이 양파빵만큼은 고르지 않기를 바라야 하는 걸까.
오늘도 퇴근하며 사모님의 곰팡이 핀 애착도마를 어떻게 하면 버릴 수 있을지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