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의 상해 이야기 18-뜻밖의 평등

by 12306

by 안나

2022년 8월 13일 토요일

오늘 상해 기온은 체감 온도 50도가 넘는 것 같아요.

아스팔트하고 찜질방 하고 누가 더 후끈한 지 내기해도 되어요.

상해 아파트 봉쇄가 풀리니 더위가 저를 봉쇄하네요.


제가 처음 해외 배낭여행을 온 곳이 중국이었습니다. 북경, 상해, 항조우를 배낭여행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제가 중국에서 이렇게 판 깔고 살게 될 줄 몰랐습니다. 알았으면 그때 집을 사겠죠. 당시에는 여행 비자로도 집을 살 수 있었고 대출도 집 값의 60%까지 가능했었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하면 호랑이가 담배 들고 올 거예요.


당시 기차표를 사려면 외국인 전용 창구가 따로 있었어요. 중국인들이 떼로 줄 서 있는 창구보다 외국인들만 따로 기차표를 살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기차표가 A4 종이 한 장만큼 내역서가 길었습니다. 에어컨 비용, 청소비 등등 기차표에 구구절절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기차 타는 시간이 길어서 하나하나 다 읽어볼 여유도 있었습니다. 북경에서 상해까지 17시간 걸렸습니다. 지금은 빠른 애로 타면 4시간도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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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역에서 웃통 벗고 기차표 사려고 줄 서 있던 중국 분들의 모습은 지금도 선합니다. 기획서만큼 길었던 중국의 기차표는 종이 한 장으로 슬림해졌습니다. 갑자기 다이어트한 기차표가 신기했지만 들고 다니기 편했습니다. 외국인 전용 창구는 사라졌고 저는 중국인들과 함께 사이좋게 줄 서서 기차표를 사야 했습니다. 끼어들기는 물 스며드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그들과 줄 서 있으면서도 국가에 세금 내겠다는 열정으로 담배 푹푹 피워 대는 사람들과 신경전, 육탄전을 벌이면서 기차표를 사야 했습니다. 출발지에서만 기차표 구입이 가능해서 여행 목적지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하는 게 다음 목적지로 가는 기차표를 사는 거였습니다. 기차표 일정에 여행 일정을 맞추면서 중국 배낭여행을 했습니다. 걸어서 지구 한 바퀴까지는 아니어도 중국 기차만으로도 지구 한 바퀴는 돌았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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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표는 전산화되었습니다. 더 이상 임프린트 방식이 아니라 전산으로 출력하는 종이 티켓으로 바뀌었습니다. 전산화되었고 이제는 출발지가 아니어도 다른 곳에서도 출발하는 기차표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체 일정에 맞는 기차표를 미리 사고 출발할 수 있는 계획성 있는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종이 티켓을 받기 위해서는 출발지가 아닌 곳의 티켓을 받기 위해서는 5위안의 수수료를 지불했습니다. 그 정도 비용은 미리 티켓을 받을 수 있다면 충분히 지불할 수 있는 비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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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중국은 기차표 실명제를 실시했습니다. 암표와 표 사재기로 명절이나 성수기에 기차표 사기가 어려웠거든요. 부당한 이득을 올리는 암표상과 여행사에게는 날벼락이었지만 저 같은 일반인들에게는 봄비 같은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초창기 실명제는 어설퍼서 아무 이름이나 넣어도 표 구매가 가능했었지만 중국을 띄엄띄엄 보면 안되죠. 빠른 속도로 오류를 수정하면서 이제는 진짜 실명으로 기차표를 사야 합니다. 외국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명분은 암표와 사재기 근절이었지만 그 뒤에는 이동 통제와 제한이라는 의도도 있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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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종이 기차표는 사라졌습니다.

경비 청구를 위한 종이 티켓은 기차역 창구에 가면 받을 수 있지만 이제는 중국인들은 신분증, 외국인들은 여권으로 기차를 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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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6이라는 한국의 코레일과 같은 앱에서 구매를 하면 됩니다. 쯔푸바오나 위챗 페이 같은 모바일 페이 기능은 필수로 있어야 하고요. 실명 인증도 해야 합니다. 실명 인증을 안 하고도 티켓을 살 수 있지만 웨이팅을 걸거나 여러 구간의 표를 사려면 실명 인증을 해야 합니다. 이게 난이도가 높아요. 기차역 창구에 가서 여권을 제시하고 해야 하는 데 직원마다 숙지도가 달라서요. 저도 몇 번의 시도 끝에 완전한 실명 인증이 되어서 기차표 웨이팅도 걸 수 있어요.


좋은 의도였던 아니었던 중국 기차표의 실명제는 저 같은 외국인에게 평등한 기회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중국인들과 같이 줄 서서 힘들게 표를 사지 않아도 되고 암표상과 여행사의 사재기 때문에 구경도 못하던 기차표도 이제는 손가락만 부지런하면 구할 수 있습니다.


12036 앱은 제게 금요일 저녁 퇴근 후 기차역으로 가면서 목적지를 정하고 돌아오는 일정의 기차표를 사고 떠나는 주말 여행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 나라가 준 뜻밖의 평등으로요.


지난 주말에 남경을 다녀왔습니다. 다음에는 남경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상해의 역사가 시작된 곳, 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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