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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이 Aug 05. 2020

산책

아빠와 함께 걷는 일

#
나의 어린 시절, 어느 시점에
아빠는 분명 어린 나의 느린 걸음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걷던 날이 있었을것이다.

내가 커버리고 아빠가 나이가 드시고
그리고 아빠가 뇌졸중 진단을 받은 이후에는
늘 내가 아빠의 느린 걸음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걸었다.

아빠보다 빠른 내가 아빠를 배려해 걸음의 속도를 늦추어 걸었던 그 때
나는 내가 어른이 됐다고 생각했다.



#
우리는 항상 걸을 때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아빠가 뇌졸중을 진단받은 이후에 거동이 편치 않으셨고 그래서 엄마, 언니, 나, 우리 중 누군가는 늘 아빠의 손을 잡아드렸다.

그렇게 10년을 지내다보니 우리는 늘 그게 익숙했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며 말했다.

- 부녀지간이 참 다정해 보이네요.
그럼 아빠는 기뻐서 웃었고 나는 괜시리 뿌듯해서 웃었다.




#
"자자 일어나."
"아~~~나는 안가고싶어."

어린시절 아빠는 주말마다 등산을 가자고 우리를 깨우셨는데, 집에서 뒹굴고 싶었던 어린 나는 그때마다 매번 이불 속으로 숨어버렸다.

지나고보면 이불 속에 숨었던 그 하루는 기억조차 나지않지만
어쩌다 아빠를 따라나서 등산을 갔던 날은
솔방울도 줍고
다람쥐도 보고
좋은 공기 마시며
내려오는 길에 도토리묵에 더덕까지 맛있게 먹은 신나는 기억들만 가득하다.

그렇지만 그 다음 주말,
아빠가 부를때면 나는 또 이불 속에 숨어버렸다.

조금 귀찮고 힘든 것을 이겨내볼걸
그랬다면 좋은 기억이 더 가득했을텐데




#
늘 우리를 움직였던 건 언니였다.

아빠를따라 등산을 더 많이 간 것도 언니다.
나는 늘 내가 활동적이고 언니가 집순이라 생각했는데,
크고보니 나는 영락없는 집순이, 언니는 활동가였다.


언니덕에 부모님을 모시고 여의도 벚꽃 구경도 갔고
가족끼리 일본도 태국도 베트남도 갔다.

수많은 걸음을 함께 걸었던 많은 순간이 언니의 계획덕이었다.




#
날이 좋아지면 아빠 생각이 난다.
벚꽃엔딩이 울려퍼지면 사랑했던 애틋한 연인이 아닌,
흐드러지는 벚꽃 길을 함께 걸었던 아빠가 생각난다.


날이 더워지면 아빠 생각이 난다.
태국의 야시장에서 호텔까지 걸어 오는 길,
찌는 듯한 동남아의 날씨에 지쳐 느리게 걷던 아빠 생각이 난다.


날이 추워지면 아빠 생각이 난다.
추운 겨울 일본 오사카 거리,
어딘가 높은 탑에 올라가 좋은 뷰를 보여주겠다고 호기롭게 나섰던 언니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을때, 괜찮다며 누구보다 실망한 언니를 달래주고 숙소에 돌아와 꽁꽁얼었던 몸을 녹이던 아빠 생각이 난다.



그렇게 매순간 걸을때면 아빠 생각이난다.
함께 걸을 수 있었던 더 많았던 순간들을 내가 알았더라면 좋았을텐데...


지나보면 늘 무지했던 나 자신때문에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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