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켈젠'의 결벽증에 대한 경고
순수한 것은 좋은 것인가? '순수함'(purity)은 어떠한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본연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때 묻지 않고 꾸밈없이 천만난만해서 때로는 세상 물정에 어둡고 어수룩한, 약간의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진 '순진함'(innocent, naivety)과는 구별된다. 법철학에서 가장 '순수한' 학자를 꼽으라면 단연 '한스 켈젠'(Hans Kelsen, 1881-1973)이다.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법학자인 그는 법해석 및 적용과정에서 발생하는 주관성과 정치적, 사회적, 현실적 문제들을 섞지 않고 '순수하게 오직' 법적인 기준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순수 법학 이론'(pure theory of law)을 주창하였다. Raymond Wacks 교수의 해제를 통하여 그의 순수함으로 다가가 본다.
한스 켈젠은 18세기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 있는데, 그가 가장 중요 시 하는 것은 '기본규범'(Grundnorm)이다. 그는 시간과 공간처럼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형식적인 범주'를 적용해야만 객관적 현실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규범의 개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기본규범은 모든 법체계의 기초에서 권력(force)을 '독점'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법은 우리가 과학적 혹은 객관적으로 알 수 없는 도덕, 심리학, 사회학, 정치학 이론 등의 불순물(impurities)을 모두 제거하는 '윤리적 정화'(ethical cleansing) 과정을 거쳐 기본규범으로 향해야 한다. 그의 법체계 모델은 가장 포괄적인 '법적의무'(oughts)로부터 발전하는 상호 연결된 규범들이 흡사 '피라미드식'으로 각 규범의 상위규범으로부터 그 타당성을 이끌어내기 때문에, 모든 규범의 타당성은 궁극적으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정점에 위치한 '기본규범'에 기반을 둔다. 즉, 헌법 자체를 포함한 모든 규범은 기본규범으로부터 단계적으로 구체화되어 파생해 나간다. 그렇다면 이 기본규범은 범접할 수 없는 하나의 '종교'인가? 켈젠은 아버지가 학교에 가라고 지시하는 상황극을 통해 하나의 비유를 든다.
아들 : 왜 학교에 가야 합니까?
아버지 : 하느님께서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께서 부모가 자녀에게 명령을 내릴 권한을 부여하셨다.
아들 : 왜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까?
아버지 : (이에 대한 유일한 가능한 답변은) '신자'로서 우리는 '신'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의 명령은 곧 기본규범을 의미한다. 그는 기본규범은 그 자체로 하나의 당위로서 응당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강제적 법규'(coercive act)는 역사적으로 최초의 헌법과 그에 따라 제정된 규범이 규정하는 조건과 방식에 따라야 한다(한마디로, 그것은 헌법이 규정하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라고 정의한다. 기본규범의 타당성은 다른 어떤 규범에도 의존할 수 없으므로, 그 타당성은 항상 스스로 전제될 수밖에 없다. 켈젠은 기본규범은 오직 ‘법적 의식’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그것의 타당성은 다른 규범이나 법칙에 근거하지 않고 순수성을 위해 형식적으로 만들어진 '가설'(hypothesis)이라고 말한다. ‘기본’ 규범이라 불리는 이유는 그 유효성의 근거에 대해 더 이상 질문을 제기할 수 없기 때문이므로, 마치 신을 믿는 신자에게 '신'(God)과 같이,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사고 속에 전제된 규범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규범은 강압적인 명령을 객관적으로 유효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게 해 주고, 법질서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설명해 주는 기능을 한다. 그는 모든 인간 행위가 법규범의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전체 법질서의 유효성이 그 안에 포함된 모든 규범의 타당성의 필수 조건이라는 취지에서, "대체로 효과적인 강제적 질서는 객관적으로 타당한 규범적 질서로 해석될 수 있다."라고 한다.
Raymond Wacks 교수는 순수 이론이 경멸하는 '사회학적' 의문을 제기하는데, "법이 실제로 준수되고 있는지, 아니면 무시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며, "켈젠의 표현대로 법이 ‘대체로’ 효과적인지 어떻게 검증하는가?" 반문한다. 생각해 보면, 켈젠의 이론의 핵심의 기본규범은 그 본질로 갈수록 실체가 없는 공허함으로 귀결된다. 그의 이론은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인간만을 전제하고, 인간의 감성, 무의식, 불완전성 등 복잡하고 다층적인 측면을 간과하는 점에서 실제 인간 사회의 법집행의 복잡성을 다루기에는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또한, 법해석과 그 적용 과정에서 발생하게 되는 주관성을 포함하여, 법의 정치적, 사회적 기능들을 설명하지 못하는 점도 지적된다.
한편, 경쟁법은 체계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켈젠의 꿈꿔온 순수함으로 설명되는 부분도 꽤 있다. 헌법상 경제질서와 공정거래법으로 이어지는 규범의 위계 속에서, 시행령, 고시, 가이드라인, 심결례 등이 그물망처럼 연결되는 모습을 띠고 있고, 경제적 분석을 통하여 경제적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견지에서는 이러한 제도적 기능을 수행해 가는 이상을 그려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규제환경은 급속도로 변하고 있고, 사회적, 정치적 가치관과 판단이 끊임없이 개입하고 있는 현실에서, 추상적이고 가설적인 기본규범의 구조만으로 디지털 경제의 현실에서 불거진 문제들이 포착되고 해결되기 어렵다. 기본규범은 마치 '법은 유효하다'라고 스스로 공허한 선언을 하고 있을 뿐, 데이터독점, 알고리즘 담합, 불공정거래 구조와 같은 현실적 갈등을 해결할 기준을 제시하지 못한다. 즉, 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위시한 경제법의 복잡다단한 구조현실을 담아내기에는 너무 '순진한' 이론이다. 게다가, 이미 도래한 AI 시대는 현실과의 타협 없는 순수함만으로는 법의 타당성을 지켜내기가 힘든 상황으로 보인다. 특히, 최근에는 거대 온라인 플랫폼은 자신이 마치 '기본규범'인 양, 모든 규칙을 자신의 방식과 이익을 목적으로 생태계를 파괴해 가는 모습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