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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 삶이 아니라 다행인 건가

by 감성기복이

요즘 다시 책을 읽는 버릇을 들이고 있다. 출퇴근 시간이 길어지니 자연스레 뜨는 시간에 책에 손이 갔다. 몸은 피곤하지만 이건 참 좋은 일이다. 덕분에 올해 벌써 책을 몇 권이나 읽었다. 평소에 소설은 잘 보지 않는다. 아니 사실 초등학교 이후로 보지 않았다. 현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갑자기 소설에 관심이 갔다. 이유는 간단하다. 현실에서 답을 못 찾겠으니 소설을 보면 뭐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이상하고도 우연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문체나 생각의 폭을 넓히고 싶었다. 너무 에세이나 인문학 같은 장르만 읽으니 내 글이 더 딱딱해지는 것 같았다. 소설을 잘 모르는 나는 당연히 베스트셀러를 먼저 뒤적였고 <모순>이라는 책을 골랐다.


유명 작가의 소설이라 그런지 너무나도 훌훌 잘 읽혔다. 또 현실과 너무나 닮아있었고, 무엇보다 주옥같이 흘러넘치는 명언들이 너무나도 좋았다. 어떻게 이런 말들을 생각했을까. 아마 작가가 천재일지도 모른다. 후반부에 가서는 뒷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덮었을 때 여운이 깊게 남았다. 정말 내가 알던 사람의 실화인 것처럼 이 소설의 줄거리가 너무나 가깝게 느껴져서 마음이 뜨거웠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모순> 속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조명되고 전개되었지만 단 하나의 이야기만이 선명하다. 바로 이모의 죽음이다. 주인공의 엄마는 쌍둥이 자매가 있다. 그 쌍둥이 자매의 인생은 각자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 확연히 달라진다. 주인공의 엄마는 술주정뱅이 폭력적인 남자를 만나 평생을 힘들게 온갖 고생을 하며 살고 주인공의 이모는 아주 젠틀하고 좋은 남자를 만나 평생을 호화스럽게 누리며 산다. 하지만 결국 이모는 그 평온한 삶에서 지루함을 느꼈고 더 이상 살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모는 언니의 그 풍파 많은 삶을 부러워했다.

나 역시 읽으면서 이모의 자식들이 부러웠다. 나는 주인공의 집안쪽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나도 잘 사는 사촌이 있기 때문에 그와 나를 비교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보기 좋은 삶'은 살아본 적이 없어서 모른다. 나는 솔직히 말해 내 삶이 불행만 가득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이면에 어떤 행복이 있는지는 보려 하지도 않았고 보이지도 않았다. 내가 타고난 복과 행운을 볼 겨를도 없이 바쁘게 살아야 했다. 그리고 바쁘게 사는 게 아니면 한없이 무기력했다. 모 아니면 도인 인생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내 불행의 이면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 삶은 심심하지 않아서 다행인 건가?'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내 덕분에 그 슬픔을 빨리 잊을 수 있었다고 했다. 애가 삑삑 울고 있는데 슬퍼할 겨를이 어디 있냐고, 애 키우면서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고 말했다. 그리고 만약 그게 아니었으면 한없이 슬픔에 빠져있었을 거라고.. 어쩌면 살고 싶어서 산다기보다는 살다 보니 살게 되었다가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매일 해야 할 일들을 하다 보니 지금까지 살고 있더라가 더 타당한 말일지도 모른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내가 돌봐야 할 사람이 있어서, 어쩌면 내가 나를 살리는 게 아니라 나를 둘러싼 환경과 분주하게 세팅된 내 삶이 나를 살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네가 해석하는 것처럼 옳거나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냐. 옳으면서도 나쁘고, 나쁘면서도 옳은 것이 더 많은 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야

많이 살수록 더 힘든 것은 더 정답을 모르겠는 심정 때문이다. 세상은 흑백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세상은 로직대로 흘러가는 학문이 아니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이것만 봐도 논리와는 거리가 멀다. 누군가의 행동을 보고 당장 욕하고 손가락질하더라고 나중에 그 사정이 밝혀지면 이해가 되는 경우가 있다. 나빴던 행동에 어느 정도 정당성이 부여되고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로 넘어가는 경우를 많이 봤다. 그런데 애초에 사람 마음의 작용 자체가 그렇다. 마음은 빈대떡보다도 더 쉽게 뒤집힌다. 도덕성 역시 한결같지 않다. 이 또한 환경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답이 없다는 것은 머리를 어지럽게 하다가도 사람을 너그럽게 만든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은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마법의 주문이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하다. 자신에게 더 이상 좋은 것을 주지도 않고 좋은 대우를 해주지도 않는다. 어쩌면 스스로에 대한 옳고 그름이 너무 확고해서 그럴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 속 말처럼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한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양면성이 있다. 상황이든 사람이든 옳으면서 나쁘고 나쁘면서 옳다. 이 말을 한 번쯤 자신에게 해줄 수 있다면 조금 더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관대해질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단어하나만 바꿨을 뿐인데 분위기가 달라진다. 인생은 탐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없던 호기심이 조금이나마 생긴다. 마치 내 인생의 탐험가가 된 기분이다. 어딘가 조금은 고단함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가벼워진다. 타고난 대로 앞으로도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야 한다면 무망감이 든다. 하지만 내가 탐험가로서 방향키를 쥐고 있다면 말은 달라진다. 탐구하는 삶은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다. 어쩌면 부자 이모의 죽음을 결말로 택한 작가의 의도를 알 것만 같았다. 삶에서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미래가 뻔히 보일 때, 더 이상 탐구할 것이 없을 때 살 의미를 잃는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앞에 자꾸 무언가 일들이 닥쳐온다는 것은 아직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것을, 아직 더 알고 깨달아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그러니 힘들지만 끝내 탐구해 보라는..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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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