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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싫은 진짜 이유

타인의 삶 이라는 거울

by 감성기복이
완벽하지 않은 나를 용인할 수 없어서 죽고 싶은 거였다


나는 완벽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막연히 완벽주의자라고 생각하면 결벽증적인 모습이 떠오르는데 나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또한 누군가의 실수에 그리 민감하지 않고 나 역시 틀에 박힌 사고와 생활을 하는 사람은 아니기에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내 인생에서는 그 누구보다 완벽주의자였을 수 있다. 완벽주의자의 사전적 정의는 아래와 같다.

완벽주의(完璧主義, 영어: Perfectionism)는 이루기를 원하여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보다 완벽한 상태가 존재한다고 믿는 신념이다. 완벽주의는 자신을 향해 높은 기준을 설정하여 보다 높은 성취감을 얻고자 하는 것을 중심으로, 질서와 정돈을 원하는 성향으로 정의하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생각하는 인생의 플랜이 확고히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 플랜대로 될 것이라 믿었고 나의 노력으로 이루지 못할 것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린 내 사전에는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커가면서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좌절도 컸다. 좌절을 넘어 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완벽주의자의 사전적 정의처럼 누구보다 나 스스로 설정해 놓은 나의 기준은 높았고 그걸 스스로가 충족시키지 못하니 모든 것을 원망했다. 그리고 결국 그 화살의 방향이 향한 곳은 자신일 수밖에 없다.







살기 싫은 진짜 이유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고, 또 앞으로도 이루지 못한다면 왜 살아야 하나를 고민하게 되었다. '학습된 무기력'의 상태가 되었다. 실패는 학습된다. 패배감에 찌들어 있었다. 인생의 루저란 것이 이런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누가 내 손발을 다 묶어놓은 것 같았다. 원망과 분노라는 감정은 사람을 망친다. 그렇게 무력감에 시달리면서 매일매일 눈을 뜨면 왜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했고 그 해답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러다 한 영상을 보았는데 거기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죽고 싶은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내 삶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인생의 실패도 , 한치의 결점과 오점도 허락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내 인생이 싫고, 내 존재가 싫어서 죽고 싶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이렇게 살기 싫어서 죽고 싶은 거였고 이렇게 살기 싫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살고 싶은데 그게 아니어서 살기 싫다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도 괜찮은 사람이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굳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그랬다. 나는 내가 생각한 방향과 정반대로 살고 있었고 모든 환경과 불운에 휩싸여 그저 먹고사는 것을 해결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그러한 무망감에 살기 싫은 거였다.



'타인의 삶'이란 거울

하지만 내가 살기 싫은 이유를 깨달았다고 해서 힘이 나는 건 아니었다. 도전과 노력은 멈춘 지 오래였다. 더 이상 실패를 마주하고 절망감을 느낄 용기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지만 내 인생은 '멈춤' 상태에 있었다. 지금도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실패를 마주할 자신이 없다. 내가 원하는 것들을 모두 이루지 못했기에 항상 차선의 차선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차선이 계속되다 보면 최악의 선택까지 가게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수많은 브이로그들과 책들과 강연들과 타인의 삶을 볼 수 있는 창구라면 그 어느 것이든 들여다봤다. 단 하나도 똑같은 삶은 없었고 똑같은 성공 스토리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힘들어도 그냥 꾸역꾸역 살았고 살아있으니까 뭐라도 했다. 타인의 삶을 시청하는 것은 꽤 흥미진진했다. 상대적 박탈감이 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내 고민보다 한치 앞서 해결책을 미리 본 사람도 있었고 그들이 해주는 조언이 꽤 도움이 될 때도 많았다.


내가 에너지가 없을 때 열심히 사는 누군가를 보면 힘이 나기도 했다. 인생이 힘들 때 새벽시장을 가보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우연히 아침 일찍 대형마트를 가게 되었다. 보통 오픈 시간보다 조금 일찍 문을 열어주어 안에 들어와 있게 해 준다. 그때 멀찍이 본 마트 안의 사람들의 모습은 아주 분주했다. 신나는 트로트 음악을 틀어놓고 활기차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하지만 인상 쓰고 소리 지르며 일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모두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자신의 할 일에 몰두해 일산 불란 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서 저런 에너지가 나오는 건지 궁금했다. 이렇게 힘든 일을 하면서 저렇게 밝은 표정을 할 수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들의 삶을 보면서 느낀 것들이 정말 많았다. 비록 새벽시장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아마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이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보통 힘들 때는 나의 고민을 꺼내놓기 바쁘다. 남이 그 해결책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단 내가 너무 답답하니 꺼내놓아야 할 것만 같다. 하지만 꺼내놓고 보면 후회가 된다. 혹시나 나의 고민이 약점이 되지는 않았을까. 그리고 뾰족한 해결책이 없기에 그때뿐이지 집에 돌아오는 길에 허무함만 자리 잡는다. 힘들 때는 고민을 말하고 싶은 욕망을 잠시 잠재우고 그들의 삶을 물어보는 것이 좋다. 두서없는 나의 고민 이야기보다 그들이 겪고 지난 정돈된 애환들이 내 생각을 정리해 줄 때가 훨씬 많았다.



일단은 살아볼까?

일단 살아보기로 다시 마음잡은 날부터 생각했다. 언제까지 살지는 모르지만 일단 살기로 했으면 사는 동안은 이렇게 우울하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그래서 하나 둘 엉뚱한 것들을 하기 시작했다. 악기도 뚱땅거려 보고 그냥 가보고 싶은 곳을 계획 없이 가보기도 했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여행도 다녀보고 돈 생각하지 않고 좋은 카페도 가보았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작고 사소한 즐거움들이 모였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힘든 것은 끝나지 않았다. 더 이상 목표는 잡지 않았다. 여전히 실패는 무서웠다. 이다음은 나도 모르겠다. 이다음 챕터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만약 지금 살기 싫다면, 그리고 그 마음이 자신의 삶을 열렬히 사랑한 나머지 너무 소중해서 '이렇게는 살기 싫은' 마음이라면, 자신의 마음을 한 번쯤은 뒤집어 봤으면 좋겠다. 무조건 살아야지가 아니라 '일단은 살아보자'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죽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사는 건 그렇지 못하다. 일단 살아볼까 라는 마음은 의외로 삶의 무게를 가볍게 만든다. 나라는 사람이 가진 조건들이 아니라 내 존재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리고 '나'를 살리는 일에만 집중하자. 이번생을 사는 거 좋은 기억 하나쯤은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이 든다면 두려울 것은 더더욱 없다. 그냥 '사는데' 에만 집중하면 살기 싫은 마음이 잊힐지도 모른다. 그 마음을 까먹을 때까지만 살아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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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