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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무엇을 남길 것인가?

언니가 세상을 떠나고 제일 신기했던 건

발인 당일 날 그냥 나는 아무런 의심 없이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그냥 하느님 (어느 종교에서 어떠한 명칭으로 부르던)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오히려 신이 있다면 왜 우리 언니를 살려내지 않고

그런 일이 벌어져야 해야만 했는지를 원망하는 게 더 맞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나는 

창조자의 존재를 그날 영적으로 체험했다.


그렇다면 나는 죽어서 언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사후 세계는 존재하며 죽음의 등급에 따라 존재하는 세계도 다른 것일까?




나는 그 후로 미친 듯이 죽음과 임사체험(Near-death experience)에 관한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내가 읽었던 책으로는 존 디디 안(Joan Didion)의 "The Year of Magical Thinking"과 어니스트 베커(Ernest Becker)의 "The Denial of Death"등이 있다.


수많은 책을 읽고 그 책들이 하나같이 한 방향으로 가리키던 진리를 발견했다. 그것은 "지구상의 우리는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수많은 세포들이 한 몸에 함께 존재하는 것과 같다"라는 것이다.

우리는 늘 갈등 상황에 놓인다. 지금 이 시각에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나와 다른 정치색, 피부색, 종교로 인해 우리는 싸우고 또 싸운다. 하지만 완전히 달라 보이는 너와 나의 존재도 결국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이다. 당연히 나는 타인이 아닌데 너=나라는 공식이 성립된다는 것이 얼핏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좀 더 너그러운 내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즉 타인을 위하는 것이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이것이 심리학자 아들러가 "미움받을 용기"에서 이야기하는 "타자공헌"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라고 여겨질 때에만 자신의 가치를 실감할 수 있다. 는 말이다. 내가 브런치를 하는 이유도 이와 맞닿아 있다.


따라서 죽어서 무엇을 남길 것인가? 에 대한 나에 대한 대답은 곧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나의 삶의 가치관과 일맥상통한다. 내가 하는 일이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베풀고 위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내가 태어난 이유이자, 삶의 목적이자 내 삶의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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