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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로콜리 May 14. 2022

내가 무너져 내리던 날

#5

❚ 이생망


“엄마, 나 이번 생은 망한 건가?”


2020년은 내 인생의 가장 밑바닥을 찍은 시기였다. 암 선고, 승진 누락, 파혼, 암 재발과 전이.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약 6개월 동안. 한참 잘 나가던 내 인생은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86년생 암 환자는 없나요?


항암 주사실에 들어가면, 놀랄 만큼 암 환자가 많았다. 그런데 서글픈 사실은 이렇게 많은 암 환자 중에 내 나이가 제일 어리다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항암제가 바뀌면 아주 큰 일이 나니까 병원 측에서는 각 항암제에 해당하는 환자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크게 써서 붙여놓았다. 나도 모르게 항암 주사실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다른 환자들의 나이를 보게 되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나랑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을 보면서 위로받고 싶었던 걸까?

내 또래의 사람들은 여기 없었다. 아마 다들 열심히 일하고 있거나 결혼도 했겠고, 다들 저마다의 인생을 알차게 살고 있겠지? 이 세상에 나만 멈춰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 혼자 덩그러니 버려진 듯.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오로지 나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엄청나게 외롭게 느껴졌다. 그렇다. 이 시기에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외로움’이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인간의 삶이란 원래 개별적이고 고독한 것이다. 인간은 혼자 태어났고 혼자 죽는다. 부모님이 아무리 나를 사랑해도 나 대신 아파줄 수 없다. 어느 날 엄마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엄마가 너 대신 아플 수 없다는 사실이, 그게 가장 나를 외롭게 하더라.”


삶은 외로운 것이다. 그런데 투병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은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외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가족, 친구, 지인 등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연대감, 연대 의식, 사랑, 의리, 연민 등. 마음속에 이런 감정들이 있다면 고독감은 감정의 일부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들이 없다면 우리의 마음속은 외로움으로만 꽉 차게 되고, 이렇게 되면 삶에서 행복을 찾기가 어려워진다. 삶이 외롭고 불행해지는 것이다.


내가 무너져 내리던 날, 내 인생의 밑바닥을 찍은 시기에 가장 위로가 되었던 것은 바로 사람들의 '관심'이었다. 친구들의 병문안, 안부 연락, 가끔 보내오는 선물들. 특히 성당 사람들이 직접 만든 음식들을 보내주었을 때,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해주었을 때 이런 과분한 사랑을 받아도 되는지 미안할 정도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암 수술을 받던 날, 어느 기도 모임에서 나를 위해 수술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계속 기도를 해주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나는 그 기도 모임 회원도 아니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냉담자에 가까웠다. 모태신앙이었지만 하느님을 제대로 믿어본 적 없었고, 신앙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 없었다. 주말마다 성당 가는 것이 귀찮은 사람, 소원을 빌 때나 하느님을 찾는 사람,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한 적 없는 사람, 일이 잘 풀리면 내 덕, 하느님께 감사해본 적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겨우 그런 나에게 내 얼굴도 모르는 신부님, 수녀님들, 신자들이 나를 위해 엄청나게 많은 기도를 해주었다. 내가 가장 잘 나갈 때가 아니라 가장 최악일 때 나에게 보여주는 사람들의 관심이 나를 버티게 했다.


❚ 삶이 설레기 시작했어


받은 사랑을 갚고 싶어졌다. 나도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싶어졌다. 살면서 마음 한 부분이 늘 공허했는데, 비로소 충만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날 찾아오신 것 같았다. 처음 고통이 한꺼번에 찾아왔을 때 하느님을 외면했다. 애초에 하느님을 찾는 것이 익숙하지도 않았고, 원망할 용기는 없어서 그저 외면했다. 그랬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기댈 곳이 하느님뿐이라는 사실을 점점 느끼게 되었다.


‘그랬구나! 내가 놓아버린 손을 하느님께서는 계속 잡고 계셨구나!’


천국이나 구원을 믿지 않는 요즘의 세상에서 천국과 구원을 꿈꾸는 나는 바보 같은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바보 같은 길을 가고 싶어졌다. 그 길에 진짜 행복이 있으니.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특별한 총애를 받고 있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의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들의 삶은 유한하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누구나 공평하게 한 번씩 죽는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쓸데없는 것에 매달리게 된다. 그렇다면 진짜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행복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과거의 나는 돈, 지위, 권력, 명예, 외모, 학벌 등 허영과 쾌락 속에서 기쁨을 찾았다. 하지만 이러한 것에서 추구하는 행복은 결국 내 기대에 어긋났다.

내 인생의 가장 밑바닥을 찍고 나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사랑이었다. 사람들이 내게 베푸는 사랑을 느끼면서 그동안의 나는 참 오만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0년은 내 인생의 가장 밑바닥을 찍은 시기였지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시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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