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차피 살아야 100년인 것을 (55)과거집착

,과거집착

by seungbum lee

과거 집착

Q: 왜 "그때는 좋았는데"라고 말할까요?

A: 과거는 미화되기 때문입니다. 해법은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10년 후의 나는 지금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유리의 시간

​“아, 그때가 좋았지. 김대리, 요즘 신입들은 우리 때처럼 끈기가 없어.”

​점심시간, 박 부장은 숟가락으로 찌개 속 두부를 으깨며 습관처럼 과거를 회상했다.


서른두 살의 이유리 대리는 건너편 자리에서 말없이 순대국밥을 넘겼다. ‘또 시작이군.’ 유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박 부장의 레퍼토리는 늘 같았다. IMF 시절의 어려움, 야근과 주말 근무로 다져진 팀워크, 그리고 ‘꼰대’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그 시절의 순수함.

​유리의 눈앞에는 뿌연 김이 서린 국밥처럼, 자신의 미래도 불투명하게 느껴졌다. 대리 3년 차, 승진은 멀고 연봉은 제자리였다. 주말에도 울리는 업무 전화와 퇴근 후에도 이어지는 상사의 메신저. 번아웃이라는 단어가 몸에 달라붙은 껌처럼 느껴졌다.



​“유리 씨도 나중에 되면 지금이 좋았다고 할 거야. 팍팍한 사회생활도 돌이켜보면 다 추억이지.” 박 부장의 말이 유리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추억? 지금 이 순간이 과연 아름다운 추억으로 포장될 수 있을까.

​퇴근 후, 유리는 익숙하게 스마트폰을 켰다. 소셜 미디어 피드에는 화려한 해외여행 사진, 잘 나가는 친구들의 브런치 모임, 그리고 행복해 보이는 연인들의 모습이 가득했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대학 시절, 유리는 꿈이 많았다. 공모전에 참가하고, 교환학생을 준비하며 밤을 새우던 열정적인 순간들. 그때는 미래가 반짝이는 별처럼 가까이 느껴졌다. 졸업 후에는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되어 여유로운 삶을 살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취업문은 바늘구멍이었고, 어렵게 입사한 회사에서는 자잘한 업무와 인간관계 스트레스가 유리를 짓눌렀다.

​문득, 오래된 외장하드에 담긴 사진 폴더가 생각났다. 풋풋했던 스무 살, 친구들과 배낭여행을 떠나 밤새도록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던 사진들. 그 사진 속의 유리는 지금과는 너무나 달랐다. 생기 넘치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눈빛.

​그녀는 사진을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그때의 유리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지금의 유리는 그 시절의 자신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더 즐길걸. 그때 더 용기 낼 걸. 그때는 젊고 예뻤는데.’



​어느 날, 유리는 평소 즐겨 보던 유튜브 채널에서 한 영상에 멈춰 섰다. 나이는 지긋하지만 에너지 넘치는 여행 유튜버가 칠레 파타고니아 빙하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영상의 제목은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

​유리는 홀린 듯 영상을 끝까지 시청했다. 유튜버는 말했다. “사람들은 늘 과거를 그리워해요. ‘그때는 좋았는데’ 하고요.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순간도 1년 뒤, 10년 뒤에는 ‘그때가 좋았지’ 하며 그리워할 과거가 될 거예요. 가장 젊고 에너지 넘치는 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그 말은 유리의 머릿속을 망치로 때리는 듯했다. ‘맞아, 10년 뒤의 나는 지금의 나를 그리워할 거야.’ 팍팍한 직장생활에 갇혀, 미래를 불안해하며 과거에 집착하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녀는 당장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새로운 경험을 하거나, 하다못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변화라도 시도하고 싶었다.


​다음날, 유리는 퇴근 후 헬스장을 등록했다. 예전부터 배우고 싶었던 외국어 학원도 알아봤다. 주말에는 혼자서라도 가까운 산에 오르기로 했다.


거창한 계획은 아니었다. 그저 작은 시도들이었다.

​헬스장에서 땀을 흘리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조금은 지쳐 보이지만, 여전히 건강하고 단단한 몸. 외국어 학원에서 서툰 발음으로 문장을 따라 할 때, 잊었던 학구열이 다시 타올랐다. 산 정상에서 탁 트인 풍경을 바라볼 때는 가슴속 답답함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어느 날 저녁, 박 부장이 또다시 “우리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는 유리는 미소 지으며 박 부장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박 부장님도 지금 이 순간을 10년 뒤에는 그리워하시겠지.’



​유리는 더 이상 과거에 갇히지 않았다. 현재의 고단함은 인정하되, 미래를 위한 작은 씨앗들을 심기 시작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오늘 흘린 땀방울과 오늘 배운 새로운 단어가 10년 뒤의 자신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추억과 자산이 될 것이라는 것을. 유리의 시간은 이제 비로소 '지금'을 향해 흐르기 시작했다.


keyword
월, 화, 목,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