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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주의 판사'에 대하여

사무관 출신 변호사의 대형로펌 적응기 - 15

by 사무관과 변호사

tvN에서 새롭게 드라마를 내놨다.

드라마의 제목은 '프로보노'. 출세주의 판사가 공익 변호사로 변모하는 모습을 그려낸 드라마라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 '출세주의 판사'라는 표현은 너무 낯설게 들렸다.


그래서 오늘은 법조계에 만연한 공직쇠퇴 현상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얼마 전 대학 시절 친하게 지내던 지인과 식사를 했다.

한창 변호사로서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나는 지인에게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지인은, 자신이 아는 변호사 중 '성공한 변호사'가 있다면서 그 사람의 경력을 참고해보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내가 지인에게 그 성공한 변호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냐고 묻자 지인은 판사가 되었다고 답했다. 지방에서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다가 판사가 되었으니 성공한 것이라며, '판사 = 성공'을 당연한 전제로 하고 있었다.

지인이 너무 확신에 찬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나는 지인의 말을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화제를 바로 돌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흔히 판사나 검사 같은 공직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심하면 내 지인처럼 판사나 검사가 된 것만으로도 사회적으로 성공을 이루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다.


우선 검사부터 보자. 일단 나는 검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지금껏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나 개인의 삶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검사라는 직업이 사무관이라는 직업을 버릴 정도로 매력적이라고 느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근무지부터 비교가 되지 않는다. 검사는 그 특성상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녀야 하지만, 사무관은 (설령 근무지가 서울이 아닌 세종이더라도) 붙박이 근무를 할 수 있다. 결혼, 출산, 육아를 생각하면 어느 쪽이 유리한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연봉도 마찬가지다. 동일연차로 비교하면 검사가 사무관보다 조금 더 받기는 한다. 그러나 내가 공무원을 그만둘 당시 나는 이미 사무관 6년차였다. 내가 검사가 된다고 해서 사무관 때에 비해 연봉이 크게 오를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내가 이미 공무원 생활을 해봤기 때문에 나만 남들과 다르게 판단하는 것일까? 아니. 사회생활을 전혀 해보지 않은 내 로스쿨 동기들도 검사에 관심이 없었다. 내가 다녔던 K 로스쿨의 동기는 120명이 넘었지만 그 중 검사를 지원한 사람은 몇 명 되지도 않았고, 결국 검사가 된 동기는 2명에 불과했다. 대형로펌에 취직한 동기가 50~60명에 이른 것을 생각해보면 지금 로스쿨생들이 어느 쪽을 선호하는지는 분명하다.


실제로 검찰은 지원자 부족에 허덕이자 2024년 경력검사 선발에서 필기시험을 폐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주변에서 경력검사 지원을 고민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2024년도 경력검사 신규임용 계획 공고 중 발췌




판사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바로 판사가 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현재는 법조일원화로 인해 변호사 경력이 최소 5년은 되어야 판사를 지원할 수 있다.


문제는 경력이 5년 이상이면서 법학 실력까지 갖춘 변호사가 판사를 지원할 유인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다니고 있는 로펌에서는 5년 정도 근무하면 1~2년 정도 해외유학을 보내준다(다른 대형로펌도 비슷하게 변호사들을 유학 보내고 있다). 결국 판사를 지원하려면 해외유학 기회를 포기해야 한다.


해외유학을 갔다와서 판사를 지원하면 되지 않을까? 아쉽지만 해외유학을 갔다오면 유학기간의 2배 정도 의무근무를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순식간에 또 2~4년이 지나간다. 그쯤 되면 이미 로펌에서는 파트너 변호사가 되는데, 연봉을 1/3 토막으로 만들고서 판사를 할 유인이 적다.


즉, 판사를 할 만한 역량을 갖춘 사람들은 대체로 대형로펌에 근무하는데, 대형로펌 변호사 입장에서는 5년이나 지난 다음 판사를 지원할 유인이 없는, 역설적인 상황인 것이다.


실제 현장에서 보면, 결국 판사를 지원하고 합격하는 사람들은 주로 대형로펌에 다니면서도 높은 업무강도에 지친 변호사들이거나 출산 및 육아를 해야 하는 변호사들이었다. 판사도 업무강도로 유명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대형로펌보다는 덜한 경향이 있고, 무엇보다 공무원인만큼 육아휴직 제도가 잘 되어있을 뿐 아니라 육아휴직에 대한 불이익을 받지도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몇 년 간 우리 팀에서 판사가 된 사람들은 모두 출산 계획이 있거나 아이가 있는 여성 변호사들이었다(물론 내가 최근 임용된 모든 판사들을 아는 건 아니다. 임용된 판사들 중에는 당연히 사명감과 열정만으로 지원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언론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나에게 '출세주의 판사'라는 말은 대단히 이상하게 들렸다. (다른 변호사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적어도 나에게는, '판사'는 변호사로서의 커리어를 이어나가면서도 최소한의 워라밸을 확보하기 위해 선택되는 직업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판사는 여전히 우리나라 법조계 최고의 엘리트다. 판결문들을 읽다 감탄한 순간도 여러 번 있었다. 내가 이전 글에서도 썼지만, 판사들의 법률문장은 단연 뛰어나기 때문에 하급심 판결들의 문장구조를 따라쓴 적도 많았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판사 진입의 주된 동기가 더 이상은 '출세주의'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변호사 노동시장의 구조가 과거와는 다른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현실에서 판사는 출세로 대변되는 사회적 성공의 종착점이 아니라, 일과 삶의 균형을 찾기 위한 선택지가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드라마 프로보노가 내세운 '출세주의 판사'라는 설정이 내게는 어색하다. 출세를 사회경제적 성공이라고 정의한다면, 출세를 꿈꾸는 이들이 주로 향하는 곳은 이제 법원이 아니라 로펌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고, 변호사도 예외일 수는 없다. 드라마보다 현실이 더 드라마틱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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