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반추에 반추를 거듭하게 될.

by 소라


가렵다.

입술 주변이 자꾸만 가렵다. 입술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데 왜 가렵지 라고 거울을 보며 생각했다. 손톱 끝으로 입술 주변을 살살 긁어주며 가려우면 긁어야지 하고 아이들에게 무심하게 내뱉던 내 모습이 떠올라 피식하고 웃다가 책을 들고 뒹굴뒹굴 몇 시간을 그리 퍼져있었다. 며칠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 책이 그리웠던지 시간이 잘도 흐른다. 절박한 삶의 이야기, 곪고 곪아 터져 버린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다 가려운 입술을 나도 모르게 계속 긁고 있었나 보다.

날카로운 통증이 눈을 질끈 감게 해 무슨 일인가 싶어 멍하니 손끝을 보니 진물이 툭 터져 묻어나 있다. 거울을 보니 포진 바이러스가 어느새 입술을 반이나 덮어 물집이 군데군데 잡혀있고 일부는 터져 입술 밑으로 진물이 죽 흘러내리고 있었다. 입을 벌리기만 해도 쓰린 물집들이 입가부터 포진해 있는데 헛웃음이 나온다. 흔적인가.

언제부터인가 피곤하거나 아프고 나면 늘 바이러스가 입술 위로 툭하니 올라와 보기 싫게 자리를 잡고는 일주일 넘게 치약을 묻힌 것처럼 약을 바르고 다니게 해 예쁘게 보이고 싶은 설레는 3월을 어김없이 망치고는 했다. 이 바이러스는 며칠을 쓰라림으로 괴롭히다 떠나고는 했는데, 신기하게도 피곤이 일상처럼 계속되면 나오지 않다가 그 긴장들이 풀려 널브러진 다음날이면 하나둘 얼굴을 들이밀었던 것이다. 그래도 꼭 나오기 전에는 예고처럼 빨갛게 붓고는 하더니 오늘은 기습작전인지 가렵다가 툭툭 다 올라와버렸다. 좀 심하게 앓았던 탓인지 바이러스가 난 부위 쪽의 모든 잇몸이 다 부어서 음식을 씹는 것은 고사하고 입을 꽉 다물지도 못하겠고, 물집이 입가부터 자리해 말만 해도 아픔이 지나가니 절로 입을 다물게 된다. 언제까지 아프나 보겠다고 거울 앞에 앉아 자세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입이 커지려면 입가부터 아프다고 어른들이 웃으며 말씀하셨는데, 또 내 입이 커지려는지 입을 벌렸다 다무는 순간 커다란 물집을 건드려 감각들이 온통 살아난다, 그 감각들이 밑에 감추어두었던 잇몸의 신경을 건드리고 부어있던 통증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오른쪽 뇌까지 건드리는지 편두통을 불러온다. 한참을 오른쪽으로 머리를 기울여 엄지손가락으로 두통 부위를 꾹꾹 누르고 있자니 아픔이 슬쩍 가라앉으려 멈칫한다. 거울을 바라보니 퀭한 눈의 한 여자가 머리부터 어깨까지 한껏 뒤틀어 공옥진의 병신춤을 연상케 하는데 그 모습이 괴이해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니 거울 저편의 그녀도 인상을 곧장 찌푸려온다. 흐트러져버린 얼굴이 물결에 일렁이고 일렁임에 휘청대는 반쪽을 붙잡으려 남은 반쪽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반만 일렁인다는 것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구역질이 올라와 양변기를 붙들고 호소를 했다. 제발 다 꺼내가라고. 남의 중병은 내 감기만도 못하다 했던가. 진통제를 찾아 온 집안을 뒤지다 결국은 약국으로 뛰어갔다. 심하게 피곤하냐며 혀를 쯧쯧 차는 할머니 약사는 부어오른 내 얼굴을 한참을 보다 잇몸도 부었냐고 묻더니 끄덕이는 나를 보며 또 한 번 혀를 쯧쯧 차고는 소염제, 소염진통제, 입안염증치료제, 포진바이러스 연고를 한가득 내놓으며 매끼 5알을 먹고 바르라고 시켰다. 약이 구원인양 들이붓고 바르고 나서 잠시 누워있으니 거짓말한 것처럼 아픔이 싹 가신다. 이리저리 굴러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자 인간이 이렇게 약한 존재였었나, 대체 애는 어떻게 낳았던가 생각하며 다시 거울 앞에 앉았다. 하얗게 굳어버린 연고 틈으로 부어오른 물집들이 물을 가득 머금고 대기하고, 그 밑으로 작게 부어오른 바이러스들이 언제 자기들도 물을 머금을 수 있나 앞다투어 머리를 내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손끝으로 건드려 터져 버린 물집들은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시뻘겋게 자기를 드러내 훈장을 받은 듯 기세등등하게 주변을 포섭하고 있다. 꼼꼼하게 약을 발라주란 약사의 당부를 무시하고 싹 닦아버렸다. 있는 물집들을 다 터뜨리고 한껏 기세를 부리다 꺼져버리라고 손끝으로 비비다 멈칫했다. 시뻘건 환부를 날카로운 손톱이 건드렸으니 통증이 격렬하게 밀려온 것이다.

아우~ 더럽게 아프네! 하고 면봉을 들고 꼼꼼하게 다시 연고를 발랐다. 객기 부리지 말고 얼른 낫고 보자며 거울을 보고 배시시 웃는데, 너무 웃겨서 땅을 치고 웃다가 뒤로 벌렁 누워버렸다. 지난 며칠간 시종일관 떠오르던 생각들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심한 운동을 하고, 지속적으로 쏘다니던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온, 앓고 앓았던 아프게 살아남은 흔적인가 보다. 일부러 터뜨려 다 없애버린들 그 흔적이 다 사라질까. 아프게 아프게 살아보겠다 했으니 이들을 보며 다시 한번 살아냄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연필 끝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풀리지 않던 문제를 풀어보려 고심했던 예전의 나처럼 흔적을 곱씹고 또 곱씹어 풀어가고자 하는 나의 문제들에 고심하려 한다. 약으로 인해 통증이 잦아들고, 물집들은 곧 사라지겠지만, 이들은 오래도록 흔적으로 기억되어 반추에 반추를 거듭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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