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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라 Aug 03. 2021

빈말의 무게는이백오십만 원

일상 이야기 (6)

24년 전 있었던 일이다.

그 해... 1998년은 내게 악몽의 해였다.

고스톱으로 치면 자뻑이었다. 집 나간 딸자식이 애 벤 해였으니,  그 해에 있었던 긴 사연들은 각설하고

내가 만삭 때에 있었던 일로 바로 넘어가려 한다.


이 일화를 나는 두 가지 썰로 푼다.

하나는 나의 결혼기념일이란 사연으로 또 하나는 그때 생긴 나의 트라우마에 관한 것이다.


배가 불러오자 양재동 고급 카페의 주방장을 관두고 대치동 은마아파트 상가의 호프집의 주방장으로 일했다.

거기 호프집 사장 부부는 꽤나 유명한 사람이었다.

남편은 뮤직비디오 회사의 대표였고, 아내는 제일은행에 근무하던 은행원이었으나 IMF로 인해 남편이 부도 위기를 맞자 은행에서는 그녀를 현금을 만질 수 없는 곳으로 보내버렸다.

결국 명퇴를 하고 아파트 상가에 규모가 좀 있는 호프집을 인수받아 장사를 시작했으나 요리를 할 수 없었던 그녀는 주방장을 구했다. 저녁에 잠깐 일해주는 주방장을 구했고 그 주방장 면접을 내가 보게 되었다.


장사는 늘 하루 이삼십만 원 수준의 판매였으니 크게 할 일이 없었다.

내가 만삭의 임산부임에도 나를 고용해 준 것이 고마워서 나는 열심히 일하고 싶었으나, 할 일이 없었다.

가게 안에는 내가 처음 보는 뮤직비디오가 몇백 개가 있었고, 사장님의 남편은 그 비디오를 설명하며 과거의 무용담을 해주곤 했다.

내게는 그게 태교음악이 되었는데,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내가 원숭이를 낳게 될 줄 알았다.

왜냐면 내가 가장 즐겨 틀었던 뮤직비디오는 보니엠의 노래였으니...... 


여사장은 낮에는 국가에서 시행하는 실직자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에 나갔다.

거기를 이수하면 월 육십만 원을 받기 때문이라며 그곳을 다녔는데 그 시간에 두 딸의 식사를 챙겨주는 아르바이트를 나에게 시켰다.

만삭 때 나는 세 곳의 직장에서 일을 했다. 그래야만 애를 낳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 다섯 시에 무거운 배를 들고 옥탑방에서 내려와 차를 빼주고, 그리고 10시에 가락시장에 가서 배추를 사서 김치를 담가 판매를 하고 네시에는 여사장의 집에 가서 두 딸의 간식을 챙겨주고 5시에는 호프집으로 출근을 해서 새벽 2시에 마치는 일과


불과 일 년 전에는 첫 시집을 발간하고 종로에 있는 교보문고에 누워있던 나의 시집이 많이 팔리기를 기대하며 작가 팬 사인회를 꿈꾸던 내가, 시집을 내고 일 년 뒤 혼전 임신한 여자가 되어 만삭의 몸으로 세 곳의 일을 하게 된 사연이 얼마나 기가 막힐까


은마 아파트에서 새벽 2시에 퇴근을 할 때면 애 아빠가 그 시간에 맞춰 가게 앞으로 온다.

그러면 그를 태우고 나는 영동대교 앞에서 기름을 만원치 넣고 영동대교를 건너 성수동 옥탑방으로 향했다.

매일 직장을 구하러 다닌다며 내게 돈 만원들 들고나가던 그 남자.

연애 중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남자는 잘 나가는 CF 감독이 아니라 실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도망쳤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그 대가로 나는 하루에 세 곳의 일을 하며 만삭의 몸으로 운전 못하는 남자를 조수석에 태우고 퇴근을 했어야 했다. 그러니 그 시절 영동대교가  내게 주는 의미는 한강을 건너는 다리가 아니었다.  나를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생과 사의 다리였다.

핸들을 꺾고 싶다는 생각을 수백 번 하면서 건넜던 다리였다.

핸들만 한번 꺾으면 내가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우리는 그날 희한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 친절했던 여사장 언니에게 그날의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신문을 보던 언니가 소리쳤다. 

"소연아! 이것 좀 봐~"

(그 당시 나는 시집을 발간할 때 쓴 필명, 소연으로 불리었다)

"LG에서 수필 공모전을 한데. 주유소를 이용하는 고객들이 겪은 일화를 바탕으로 한 수필이래

너 어제 그 일 여기다가 공모해봐~"


신이 주신 기회였다.

어제 내가 겪은 그 놀라운 경험이 돈이 된다는 사실에 나는 바로 앞 문구점에 가서 규격봉투와 편지지를 샀다

그리고 단숨에 어제의 일을 기록했다.

그리고 나는 우체통으로 가기 전에 말했다.


"언니 내가 이거 대상 타면 언니 반 줄게요~"

그리고 나는 한 달 뒤 대상을 탔다.

오백만 원이라는 상금을 받았다.

그 상금으로 출산 준비를 할 수가 있었는데. 그 상금의 반을 주겠다고 한 말을 지키지 못했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을 아주 가벼운 선물로 대신했다.


내 깜량이 그 정도였다. 

이백오십만 원을 주는 게 아까운.....

그때 나는 나 자신을 알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절대로 빈말하지 않게 되었다.


"너 로또 당첨되면 얼마 줄 거야?"

"세금 제하고 십 프로!"

"야~ 뭐가 그렇게 디테일해. 그냥 반 줘~"

"싫어, 난 반 주기 아까울 거야. 그냥 십일조 할게~"


커뮤니티의 댓글에 누군가가 말한다.

"오~ 음식 맛있겠네요. 택배 되나요? "

이런 댓글을 볼 때마다. 센스 있게 받아쳐야 하는데 절대로 빈말로 가져다 드릴게요.라는 말을 안 한다

엔간해서 하지 않고 하면 무조건 지킨다. 그게 내 좌우명이 되어 버렸다.


할 수 있는 말만 하자.

할 수도 없는 말을 뱉어내고 그걸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나를 볼 때면

나는 그날의 일을 떠 올린다.


그래서 나는 내 앞에서 두 번 이상 빈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조용히 거리두기를 한다.

왜 두 번 이상이 되었을 까?

한 번은 봐줘야 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했기에.....


그래서 밥 먹자. 커피 마시자 라는 말 한마디를 할 때도 내게 그것은 이백오십만 원짜리 무게의 약속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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