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읽기 | 박찬국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 나는 보통 나의 행동이 의도치 않게 타인에게 피해를 준 경우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엄밀하게는, 타인과의 관계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이를 최대한 빠르게 해결하고자 하는 동기로써 양심의 찔림을 느낀다. 그래서 기능적으로 양심은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개개인에게 내재된 어떤 장치라는 생각이 든다. 만일 양심이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지 않다면, 타인에 대하여 점점 더 무심해질 것이고, 그로 인해 집단 이기주의가 만연하게 되어, 하루종일 서로 다투고만 있을 것이다. 양심은 이처럼 사회와 본래 관련이 깊은, 지극히 사회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러한 양심을 일상적인 양심으로 분류하면서, 이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 양심 또한 존재한다고 보았다. 일상적인 양심이 사회적인 것과는 다르게, 그것은 나의 존재에 관한 물음을 던지는 내면의 목소리에 가까운 무언가이다. 예컨대 내가 취업에 대한 사회적인 목소리와 조언들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우선적으로 이 문제를 나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진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는 단순한 망설임이나 타협과는 달랐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순간의 경험을 양심의 부름이라고 불렀다.
하이데거는 사람에 따라 빈도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양심의 부름이 우리 안에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존재로 살아가는지에 대한 두 가지 존재 방식, 즉 비본래성과 본래성이 드러낸다고 말한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비본래성은 사회적 존재로서 타인의 기대와 사회적 관습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이라면, 본래성은 스스로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존재임을 인지하고, 이를 기반으로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양심의 부름은 이러한 본래성과 관련이 있다.
사실 현실적으로 볼 때, 사회에 속한 우리는 비본래성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며, 결코 나쁘다고 볼 수 없다. 더 나아가 본래성에 대하여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본래성이라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삶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단적인 예로, 낙농업을 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두 청년이 있다. 그리고 두 청년 모두 그들에 주어진 길이 어쩔 수 없이 가업을 물려받는 것뿐이라고 치자. 현재 그들 모두 그 업을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아, 그것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 때, 그들의 삶을 외부에서 바라보자면 이들의 삶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것은 인간의 삶이 일반적으로 비본래성을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A라는 청년은 본래성이라는 방식에 대하여 인지하고 있고, B라는 청년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본질적으로 그들의 삶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일까?
비본래성을 따르는 삶에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여러 단계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엄밀하지 않지만 직장에 들어가고, 삶의 자립을 이루고, 결혼하고, 자녀를 키우는 등 일련의 단계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타인의 기대와 사회의 규범을 따르며 살아가는 그 흐름 속에서, 지금 내가 어떤 단계에 놓여 있는지 본능적으로 체감할 수 있다. 특히 내게 주어진 어떤 단계의 끝에서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는 순간을 우리는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양심의 부름을 받게 된다는 것도 말이다.
이때, 양심의 부름을 무시하고 관성에 따라 주어진 선택지 내에서 결정을 내릴 것인가, 아니면 그것에 귀를 기울여 나 스스로의 선택을 만들어 낼 것인가? 앞서 말했던 두 청년의 예시처럼 그 순간 이전과 이후, 비본래성을 따르는 우리의 삶의 모습은 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러나 비본래성 속에서도 본래성에 대한 인식을 놓치지 않고, 나만의 선택을 만들어간다면, 우리는 삶의 여러 장들을 이어 나만의 고유한 서사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내 존재를 책임지고, 그 과정 속에서 좀 더 풍요롭고 의미 있는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