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회사생각

기획자의 운수 좋은 날

일이 잘 풀릴수록 더 불안하다.

by 피넛

오늘은 희한한 날이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평소 칭찬에 인색한 팀장님이(우리 팀장님은 칭찬뿐 아니라 모든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해당 연령대의 어르신들이 으레 그러하듯 부끄러움이 많으셔서 그런 것으로 추정된다.) “어제 늦게까지 고생이 많았어요. 어제 확인해 준 데이터가 도움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셨다. (우… 우리 팀장님이?!)


다음 주 초까지 미팅을 잡아야 하는 게 3건이나 있었는데 오전 중에 관련자들의 빈 일정을 찾아 모든 미팅을 예약했다.

일정 변경을 요청하시는 분이 한 분도 계시지 않았다. (어?! 그럴 리가 없는데?)


외주 개발사와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3개월가량 진도가 나지 않았는데, 오늘 극적으로 아웃풋이 나왔다.

기획 리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좋네요~”, “괜찮은데요?”, “기획 방향에 공감합니다.” 라며 의견 일치를 보였다. (뭔가 일이 진행되고 있다!)


또 다른 프로젝트의 1차 QA가 마무리되고 다음 phase로 넘어갔다. (야호! 아… 아니?! 잠깐?! QA이슈가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하지만 지금은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아. 일단 환호하자, 야호!)


또 또 다른 프로젝트를 함께하는 개발자가 “저희 도메인은 지금까지 이렇게 챙겨주신 분이 없었는데, 항상 잘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DM을 주셨다. (사실 못 챙기고 있던 과제 중 하나였는데?!!)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 모든 일이 오늘 하루 벌어진 일이다.


심지어 오늘 점심시간에 찾아간 회사 근처 맛집에 대기 없이 들어가서 맛있게 점심을 먹었고, (평소에는 조금만 늦어도 대기해야 하는 곳)

야근하면서 먹었던 샌드위치의 맛은 극상이었다…!

그 빵집은 처음 가본 빵집인 데다가 내가 구매한 샌드위치는 모든 빵이 다 팔리고 남은 단 1개의 샌드위치였단 말이다….!! (holy……!!)


이렇게 모든 것이 잘 세공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갈 때,

누군가는 희열을 느끼겠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가 된 마냥, 묘하게 딱딱 맞아떨어지는 일 속에서 은은하게 다가오는 불안과 어둠을 감지한다.

(생각해 보니 오늘 점심에 먹은 메뉴가 하필이면 설렁탕이었다…)


칭찬이나 감사를 받으면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혹시라도 그 안에 숨은 의도나 의미가 있는 건 아닐지 곱씹고,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그럴 리가 없다. 틀림없이 구멍이 있다.’ 하고 의심하고,

QA이슈가 없으면 좋아할 일인데, ‘이렇게 일이 잘 풀릴 수는 없다. 미처 보지 못한 결함이 있을 것이다 ‘ 하고 더 걱정하고 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게 내가 쌓아온 빅데이터일 수도 있고,

아니면 누군가의 말이나 현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안으로 왜곡하는 나의 단점일 수도 있겠다.

괜히 잘 풀리는 일에 혹시라도 하루의 끝에 큰 불행이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쉽사리 퇴근을 하지 못하고 오늘 한 일들을 되짚어보느라 귀가 시간이 늦어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이 글을 쓰며 하루가 넘어가는 사이에 우려했던 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루가 마무리되려고 하자…

잘 풀리는 일에 그저 기뻐하고 감사하면 될 일인데,

잘 풀리면 또 잘 풀린다고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어 즐기지 못한 것이 한스럽기만 하고 불안에 떨며 전전긍긍했던 지난 시간이 아쉬웠다.

(괜히 쫄았네)


없애고 싶지만 없어지지 않는 이 불안 센서.

아무래도 하루아침에 없어지진 않을 것 같다.


지금이라도 나의 운수 좋은 날이 진짜 운수 좋은 날로 마무리된 것에 감사해야겠다.

현실을 왜곡하지 말고, 좋은 일은 좋게만 받아들여야지.


오늘 받은 운수에 보답할 수 있도록,

누군가의 진짜 좋은 날을 만들어줄 수 있도록,

나도 내일은 칭찬왕, 감사왕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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