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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과 꿈 Aug 24. 2023

사랑은 의지에 의해 깊이를 더한다


 앞서 낭만과 낭만주의를 언급하면서 사랑의 본질에는 ‘의지’가 뒷받침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일종의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낭만주의의 개념으로는 사랑은 환상과 직관에 의해 구현된다. 환상과 직관은 이성과 상반된 개념이고 의지는 이성에 의해 작동하기 때문에 ‘진정한’ 낭만주의자라는 썩 만족스럽지 않은 조어를 선택했었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있을 수는 있다. 뻔한 이야기이지만, 그렇다고 첫인상 만으로 사랑이 유지되고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서로 다른 인격의 가장 뜨거우면서 설레는 만남이 성적인 사랑이지만, 그 사랑이 결혼이라는 결합을 이루기까지 적지 않은 갈등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렇게 합당한 나의 반쪽이라 서로 믿고 결혼을 하지만 이혼으로 끝나는 만남도 적지 않으니 그만큼 어려운 것이 사랑인가 보다.

 이렇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에는 사랑에 대한 비이성적 접근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애당초 감정이 판단을 가려 서로를 제대로 판단할 이성이 작동하지 않았거나, 사랑을 이루어 갈 의지가 박약해서 일 것이다. 말하자면 이성이 작동하지 않아 의지가 매개하지 않는 사랑은 성숙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또한 사랑이 서로 다른 두 인격의 만남이라면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의지 만으로 사랑은 성숙할 수 없다. 사랑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짝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짝사랑으로 생각하는 짧은 만남 중 적지 않은 경우가 몇 발짝 나아가지 못한, 그래서 아쉬운 사랑일 수도 있다. 속된 말로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짧았던 만남일지라도 이성적 판단이 작동하고 있었다면 말이다.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간의 종교적 갈등으로 촉발된 30년 전쟁이 끝난 후,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와중에서 노출된 인간의 무지에 대한 반성으로 합리적 사고와 이성을 강조한 계몽주의가 18세기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계몽주의의 전체주의적 성격에 대한 반동으로 19세기에 등장한 것이 바로 낭만주의다. 낭만주의의 출발이 문학운동이었다고 하지만 그 기저에는 19세기의 시대적 상황이 깔려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생뚱맞게 역사 이야기를 언급한 이유는 균형을 말하기 위함이다. 계몽주의든 낭만주의든 모두 전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였기에 헤겔이 말한 바, 각각의 시대에 ‘시대정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 가치는 그 시대가 지나서도 퇴색하지 않고 인류의 역사 속에서 축적되어 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랑도 감성과 이성이 균형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랑에 눈이 멀었다”라거나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겠지만, 사랑에는 이성적 판단과 사랑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우리는 젊은 혈기가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을 때 대부분 이 사실을 망각하고 아름다워야 할 사랑이 오히려 족쇄가 되거나 헤어 나오지 못하는 수렁이 되어 젊음을 탕진하기 마련이다. 뭐, 그래도 후회는 없다. 그 순간 자신의 전부를 다 쏟을 수 있었다면. 그래도 진심이었던 마음의 크기만큼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인생의 어느 순간인들 아쉬움이 없으랴, 하는 생각으로 매번 위안을 받는다.


 아마도 사랑 중에서도 가장 이성적인 사랑을 꼽으라면 혈육 간의 사랑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랑에는 혈연공동체라는 의식이 원시시대로부터 무리의 안위를 위해 오랫동안 내면화, 생식의 본능과 함께 본능처럼 되어 잘 드러나지 않지만, 공동체 모두가 공감하는 집단 의지가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혈육 간의 사랑에 반하는 행동을 했을 경우 그 사람은 “천륜을 저버린 사람”으로 공동체로부터 지탄을 받는다. 윤리나 도덕은 모두 이성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내면화된 집단 의지의 통제를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를 통해 가족의 사랑을 유지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개인주의가 팽배해져 감에 따라 가족 간 사랑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들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혈연의 사랑이 내리사랑이라고 자식이 부모를 해하는 일은 예전에도 언론 보도로 접하곤 했던 사건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부모가 자기 손으로 자식의 생명을 앗았다는 기막힌 소식까지 듣게 된다. 모두 우리 사회가 이성의 판단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비이성적인 사회가 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더불어 사랑도 공허한 울림이 되어 가고 있다.

 남녀 사이의 사랑에도 감정보다는 이성이 크게 작동하는 시기가 있다. 아직 젊음이 머물고 있을 때의 외모와 같은 육체적인 매력에 이끌리던 시간은 지나가고 이른바 정으로 살아가는 시간에 머물 때 우리는 전적으로 이성적인 사랑을 하고 있을 때이며, 사랑은 이성에 의해 촉발된 의지에 의해 유지되고 깊이를 더해 가게 된다. 그 대상이 가족이 되었던 이성이 되었던 사랑에 대한 의지가 꺾이지 않는 한 사랑은 깊이를 더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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