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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과 꿈 Oct 11. 2023

사랑의 기술, 과연 필요한 것인가

 사랑에 기술이 있을까? 이십 대 시절을 돌이켜 보면 연애박사라고 불리던 친구들이 드물지 않게 있었다. 사랑에 기술이 있다면 그 친구들이야말로 사랑의 기술을 현란하게 구사했으리라 여겨지는 부류에 속할 것이다. 그 친구들이 부러울 것까지야 없었지만, 사랑의 열병 같은 것은 내 일이 아니라는 듯 쉽게 여자를 만나고 헤어질 수 있는 그들의 사고가 신기했다. 물론 그들 중에는 보기에 경험 없이 이론에만 밝아 보이는 친구도 있기는 했지만, 그들의 경험이 어땠길래 그들은 사랑에 대하여 진지하지 못하고 냉소적으로 되었는지가 더 궁금했다. 그 궁금증은 내가 첫사랑의 열병을 앓은 후 해소되었다. 첫사랑 이후 비로소 여자를 약간은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만큼 여자의 마음을 여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첫사랑과 헤어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심리적 공허가 떠나지 않았다. 사랑은 쉽게 다시 찾아오지를 않았던 것이었다. 연애박사라는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오래전 사랑을 잃고 다시 사랑을 찾아 방황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긴, 자신이 만났던 여자들을 매번 진심으로 사랑했었다는 어떤 제비족의 말도 있기는 하다. 어쨌든 사랑의 고뇌가 사랑에 깊이를 더한다 할지라도 그 고뇌를 덜어줄 사랑의 기술이 있다면 솔깃할 수밖에 없다. 아픔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래도 고귀한 우리 사랑이 한낱 기술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사실에 선뜻 동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랑의 기술이라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독일의 사회철학자 에리히 프롬이 쓴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이다. 에리히 프롬이 쓴 또 다른 책 ‘건전한 사회’와 함께 한때 널리 읽히던 책이다. 에리히 프롬 하면 떠오르는 소소한 일화가 있다. 1980년대 초 학생운동을 하던 대학 선배의 공판 기일에 방청객이 되어 형사 법정을 찾았던 일이 있었다. 당시 공판 검사의 피고인 심문에서 에리히 프롬의 ‘건전한 사회’가 언급되었었다. 그 검사는 에리히 프롬을 잘 모르는 듯 에리크 프롬이라고 저자의 이름을 잘 못 부르면서 ‘건전한 사회’를 불온서적 취급하고 있었다. 불온하다는 기준이야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것이지만 ‘건전한 사회’의 내용에서 불온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건전한 사회란 ‘소외’가 해소되는 사회, 곧 현실적으로는 사회주의, 정신적으로는 사랑이 충만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 주제인 책이다. ‘사랑이 충만한 사회’라니, 읽기에 따라서는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모호함이 있는 내용이다. 그 모호함을 조금이라도 해소시켜 줄 책이 바로 ‘사랑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책을 두고 불온서적이라고 말했으니 실소를 금하지 못할 일이었다.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흔하게 생각하는 젊은 때의 ‘강렬한 감정’의 실체를 찾는다거나 사랑에 대한 진보적인 사상을 찾고자 한다면 한없이 따분한 책이 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보수적으로 생각될 부분이 많은 내용이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철학자인 저자의 입장에서 볼 때 현대사회가 사랑을 잃어버린 부분이 많기 때문에 그의 글이 보수적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이성 간의 사랑을 언급하면서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본질적으로 의지의 행위, 곧 나의 생명을 다른 사람의 생명에 완전히 위임하는 결단의 행위여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이것이 ”결혼은 결코 파기할 수 없다는 사상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현대 서구 문화에서 용인되는 사랑은 “자발적이고 감정적인 반응의 결과이며, 거역할 수 없는 감정에 갑자기 사로잡힌 결과”로 에리히 프롬은 현대 서양 사회에서의 사랑의 붕괴를 말한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처음 출간된 것이 1956년으로 출간된 지 벌써 반세기가 지난 책이다. 따라서 지금의 시각으로 볼 때 신선감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에리히 프롬의 시각이 전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사랑이 훈련과 인내, 그리고 습득이 필요한, 실천을 위한 기술이 필요한 과정이라는 사실에 처음 주목했다는 것에 그 가치가 있다 할 것이다. 에리히 프롬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 또한 경제적 교환 가치로 전락했다는 자괴감에서 사랑의 회복을 언급한 사실에 공감하면서도 그 실천적 기술에 대해서는 피상적인 접근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히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강렬한 감정만이 아닌, 결의이자 판단이고 약속“이라는 단언에 크게 공감하게 된다. 말하자면 사랑은 의지라는 뜻이다. 이에 공감하면서도 사랑과 결혼에 대한 에리히 프롬의 보수적인 시각에는 온전하게 공감할 수가 없다. 앞 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결혼이 여러 면에서 여전히 압도적인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성을 억압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을 처음 출간했던 1950년대 중반에 비해 전통적인 결혼제도가 많이 흔들리는 시대를 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도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아직은 그 가치가 온전히 퇴색하지 않은 것은 사랑을 흔드는 문제에 있어 사랑을 시작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그 해결책을 찾고자 하는 노력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기술이 있다면, 그리고 사랑의 기술이 필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랑의 기술은 사랑을 하는 당사자들의 의지에 내재되어 있으며, 이성이 인도하는 의지에 따르는 한 사랑의 기술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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