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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과 꿈 Oct 05. 2023

또 하나의 사랑은 가능할까

 또 하나의 사랑은 가능할까? 선뜻 답하기 곤란한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게다가 발상 자체가 위험하다. 법적으로 일부일처제가 합법으로 명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굳이 법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결혼이라는 제도를 벗어난, 또 다른 사랑은 불륜이라고 해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를 저버린 행위로 지탄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또 다른 사랑, 아니, 이처럼 품격 있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성의 억압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시대, 그리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신대륙에서 존재한 노예 제도 아래에서 성의 유린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시선을 멀리 둘 필요도 없이 조선시대의 축첩 제도도 마찬가지로 성을 대상화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남성에 의해 이루어진 이 일들이 합법이었고, 윤리적이지 못하다고 비난받을 이유도 없었다. 농경과 함께 시작된 문명의 탄생 이래로 여성은 억압된 성의 자리에 머물고 있다.

 여기서 페미니즘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법과 윤리적 잣대로 재단되는 본능으로서의 성이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말하자면 약자의 성을 유린한 과거의 법과 윤리 의식이 성의 억압이었다면, 오늘의 법과 윤리 의식 또한 성을 억압한 측면이 없는지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먼저, 언제나 그렇지만 법이라는 것이 반드시 정당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윤리라는 것 또한 시대에 따라 적용의 범위가 한정적이기도 했다. 결국 법이나 윤리는 어느 정도는 공동체의 질서 유지를 위해 존재하는 규범으로 항상 선을 지향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또한 이들 규범이 개인적 가치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특히 성이라는 문제와 관련을 지어 볼 때 이들 사회적 규범은 일상화된 성의 억압과 무관할 수가 없다.


 미국의 작가 너새니얼 호손의 소설 ‘주홍글자’(예전에는 ‘주홍글씨’라는 제목으로 익히 알려졌지만 ‘주홍글자’가 적확한 제목이다)는 사회적 규범에 의해 억압된 성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고발하고 있는 대표적인 소설이다.

 남편도 없이 딸을 가진 헤스더 프린과 사회적 명망가인 딤스테일 목사의 불륜을 다룬 이 소설은 청교도 정신의 허위와 그 구성원들의 위선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 그러나 보다 관심이 가는 주제는 불륜의 당사자인 헤스더 프린과 딤스테일 목사에게 성은 어떻게 억압되었는가,라는 문제다. 헤스더 프린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칠링워스와 애정이 없는 결혼을 한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떨어져 소식조차 모르게 된 사이로 실질적인 부부 사이가 단절된 상태. 그러면서 헤스더 프린은 딤스테일 목사를 사랑하게 되고 헤스더 프린은 딸 펄을 낳게 된다. 혼외 자녀를 낳았다는 사실에 간통죄를 적용, 법에 따라 형기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가슴에 간통죄를 뜻하는 단어 adultery의 첫 글자 A를 목걸이로 가슴에 부착케 하여 그녀의 삶에 음탕한 여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그리고 불륜의 상대가 누구인지 밝히기를 종용하지만 끝내 그녀는 사랑의 상대가 딤스테일 목사임을 밝히지 않는다.

 소설의 줄거리는 여기까지만 언급하기로 하고, 소설의 두 주인공에게 성은 어떤 형태로 억압되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나이 많은 남자와 애정 없는 결혼을 한 헤스더 프린은 딤스테일 목사에게서 처음으로 진정한 사랑의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녀에게 딤스테일 목사는 아마도 첫사랑이었을 것이다. 우선 애정 없는 결혼을 거부할 수 없도록 하는 사회적 구조와 관습이 헤스더 프린의 성을 억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사회적 명성과 평판 때문에 헤스더 프린과의 관계를 밝힐 수 없는 딤스테일 목사의 성 또한 억압된 것이라고 하겠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이 불편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사랑이 억압된 구조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소설 ‘주홍글자’의 배경이 되는 청교도 사회와 유사한 억압은 유교 전통의 우리 사회에서도 있어 왔다. 그러나 결론으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성의 억압을 가져오는 사회적 배경 자체가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거쳐 내면화된 규범에 의해 억압된 성의 인식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 하나의 사랑은 가능할까,라는 이 글의 제목과 연관이 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사랑’이란 우선 기혼자에게 있어 혼외의 사랑을 의미한다. 그리고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나는 추세에 비혼주의자에게는 결혼을 고려치 않는 자유연애가 될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긍정적이지 않은 관계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자의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이성에 대한 감정이 변함없이 하나의 대상을 향할 수만은 없는 일일 것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우리 존재가 완전하지 않고, 우리의 사랑 또한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일편단심으로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평생 변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는 있다. 물론 나 또한 아내를 ‘가장’ 사랑한다. 그 사실은 어떤 경우에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함께 한 시간이 두텁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 이외의 다른 여자에게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감정에 인간적인 유대가 결부되어 있다면 이성 간의 감정은 진지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적인 관계란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를 뜻한다. 본능에만 이끌리지 않는 관계, 서로를 욕망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관계는 불가능한 것일까. 이런 관계라고 육체적인 감정을 외면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남자에게 있어 남녀 사이의 감정은 대상에 대한 육체적인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면 성립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육욕에만 머물고 있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서로의 영혼을 고양시킬 수 있어야 한다.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에서 말하는 바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생식의 본능뿐만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로서 어떻게 보면 인류 문명의 기초에 해당하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또 모를 일이다. 무슨 SF영화의 내용처럼 미래에서는 부모도 없이 공장 시스템으로 생명이 탄생할지도. 그러나 결혼이라는 제도가 가진 부정적인 요소도 있다. 바로 생식의 본능에서 기인한 것으로 소유욕과 독점욕이 있다. 같은 포유류들 대부분이 짝짓기 때가 되면 수컷은 암컷을 쟁취하기 위해 피가 날 정도로 사투를 벌인 끝에 승자가 암컷을 차지, 짝짓기를 한다. 우리가 연애를 하면서 결혼에 이르는 과정에도 소유욕과 독점욕이 바탕에 깔려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여자는 질투하지 않는 남자의 사랑을 의심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집착도 사랑의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남녀의 사랑에 따르는 부수적인 감정들이 뜻하지 않게도 자유로운 성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이 불륜을 조장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성의 억압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결혼이 성을 억압하는 측면이 있다면 또 하나의 사랑은 가능한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엄청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이라고 섣불리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고, 성은 억압받지 않는 것이 옳지 않은가.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을 선택할 용기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 중에서)이라는 사실에 공감하고 함께 동참할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분명 또 하나의 사랑은 선택하기에 황홀한 유혹이다. 하지만 이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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