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Non-fiction을 각색한 것으로 1374년 고려시대의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다.]
나의 이름은 '석곡리 보개'이고 올해는 1374년이다. 이름이 좀 이상하게 생각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제주도에 살고 있는 몽고인의 후예이다. 나의 조상은 100년 전인 1273년 삼별초 항쟁 이후에 제주도가 원 제국의 14개 목마장 중에 하나로 운영되면서 중국으로부터 파견된 이후에 제주도 사람들과의 혼인으로 인해서 반은 몽고인, 반은 고려인이다. 내 아내의 이름은 ' 정 조이'이며 '버들 아기'로 불린다. 아내의 할아버지는 유배온 고려 귀족의 일원이며 나름 잘 나가는 목호의 집안에서 태어난 나를 손주 사위로 받아주셨다. 나의 직업은 '묵호'로 제주도 말로는 '말을 키우는 오랑캐'를 일컫는다. 고려의 조정 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제주도를 관리하지만 제주도는 원나라의 직할령이기 때문에 한양에서 파견된 고려 중앙관리도 우리 '목호'를 함부로 하지 못한다.
'묵호'로 제주도 말로는 '말을 키우는 오랑캐'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 몽고인의 후예인 목호는 약 1,700명 정도이다. 전체 제주도민의 인구가 이만명 정도였으니 열명중 한명꼴이다. 얼마 전에 한양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 나라가 중국에 세워졌다는 소리를 들었다. 또한 고려의 공민왕은 명나라로부터 말 2천 필을 조공하라는 지시를 받고 다시 제주도에 어명을 내렸다. 하지만 원나라(몽고)의 후예인 우리 '목호'들이 어찌 바뀐 중국의 나라인 '명나라'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말인가. 원로 묵호들의 지시에 따라 우리 젊은 묵호들은 명나라와 고려에 반기를 들어 목숨을 각오하고 피 흘려 싸울 것이다. 어찌 되었던 요즘 제주도 분위기가 심상찮다. 아내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고 아이도 가져야 하는데 세상이 어지러워 고민이 많다.
결국 공민왕은 최영 장군을 내세워 제주도의 묵호들의 처단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를 파견했다. 전함 314척에 군사 25,600명이 제주도를 에워싸고 있다. 대규모 토벌군에 대항하며 결전을 했지만 숫자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죽을힘을 다해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고려군들은 목호뿐만 아니라 우리의 친인척까지 칼날을 휘둘러결국 제주도민의 반 정도인 만명정도가 죽음을 당했다. 묵호들은 토벌대에 밀려서 중산간 지역으로, 한라산 남쪽으로 퇴각을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토벌대의 칼날에 목이 떨어져 나가고 있다. 최후까지 살아남은 목호들은 서귀포 앞바다 범섬으로 피난했다. 그곳에서 일본으로의 탈출을 계획했다. 며칠간은 버톁으나 결국 나는 밀려오는 관군의 칼날을 앞에 자결로서 생을 마감하고 범섬 절벽으로 떨어지고 있다. (*제주올레 4코스 종점 인근, 한남리 사무소에는 석곡리 보개의 아내였던 고려 정씨의 열녀비가 있다.)
7코스는 묵고 있는 제주올레센터를 출발하다 보니 어느 코스 보다도 아침에 여유가 있었다. 숙소에서 조식으로 소라죽과 토스트 2쪽, 바나나 1개, 셀프 계란 프라이 1개 을 먹고 9시 전에 길을 나섰다. 코스 내내 왼쪽으로 바다를 두고 서쪽으로 이동을 한다. 그 중심이 되는 것이 바로 바다 건너 보이는 '범섬'이다. 과거에는 사람이 살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거주하는 사람은 없고 낚시꾼들 만이 배를 타고 진입을 시도한다. 과거 650여 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은 몇 가지 지명과 연관성이 있었다. 법환포구는 '막숙'이라고도 불리고 과거 최영 장군의 부대가 범섬을 쳐들어 가지전에 진지를 구축했던 곳이고 '배염주구'는 당시 배를 이어서 범섬까지 고려군이 걸어 들어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7코스를 걷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올레길 완주하고 서울 올라가면 <묵호의 난:1374년, 정용연 지음>을 챙겨서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