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
매년 5월은 가정의 날이다. 오월에는 어린이날도 있고, 어버이날도 있다. 장난감 가게가 붐비고 거리에는 항상 카네이션을 파는 사람들이 보인다. 1년 내내 가족에 소홀히 했던 사람들은 이날은 꼭 챙겨야 된다고 생각을 했다. 그냥 일 년 내내 어린이날이면 안되고, 일 년 내내 어버이날 이면 안되는 걸까. 그렇다고 내가 항상 부모님께 잘 해 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올해의 어버이날은 나에게 특별한 날이다. 부친이 없이 맞는 첫 어버이날이기 때문이다. 카네이션도 좋지만 오늘은 모친에 대한 생각을 어버이날 생일선물로 대신하고 싶다.
첫째, 호기심이 많으시다. 내가 어릴 때 외가댁에서 엄마의 어릴 때 별명을 들은 적이 있다. '앉은 서울' 이 엄마의 별명이다.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던 모친은 여기저기서 들은 모든 정보를 이용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취미였었다. 모르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당시에는 인터넷의 '네이버' 도 '구글'도 없던 시절이라서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가가 많았다. 모친의 호기심은 성장하면서 여러 가지 취미생활로 이어져서 꽃꽂이, 수영, 등산, 미용, 요리도 수준급이시다. 국가자격증으로 미용사와 요리사 자격증도 몇 개나 갖고 있다.
둘째, 부지런하시다. 나는 어릴 때 모친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모든 여자들은 부지런하고 깔끔하다는 선입견이 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요즘도 취업한 딸내미의 방을 가끔 주말에 보면 그냥 방문을 닫아 버린다. 부친의 공무원 박봉을 견디어 내기 위해 부지런히 부업을 하셨다. 전자오락실, 기원, 사격장, 기원, 주차장을 했었다. 어머니의 빈자리는 나에게 외로운 시절과 함께 독립성을 키워주기도 했다. 가지런히 정리된 냉장고의 음식들과 정리 정돈된 집안 환경은 정서적으로 나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셋째,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내가 자라오면서 부모님에 대한 모습은 항상 티걱태걱하시는 모습이었다. 그 시대의 아버지들이 항상 그러하듯이 당신의 감정을 쉽게 들어내지 않는 것이 모친을 많이 섭섭하게 했다. 퇴근시간 땡 하면 귀가하는 일반 직장인들의 삶과는 다른 패턴의 남편을 묵묵히 견디어 내며 살았다. 어린 시절 생고생을 했던 아픔이 있는 7살이나 많은 남편을 보담듬으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한탕주의'였던 남편을 옆에서 보면서 마음 졸이면서 살았고 결국 말년에 부친이 만들어 놓은 빚을 갚기 위해 밖에서 일을 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넷째, 감성적인 사랑이 있다. 아버지는 바게트 빵으로 비유하자면 어머니는 카스텔라 같은 분이다. 항상 촉촉한 감성으로 나를 키웠다. 그 감성은 고스란히 나에게 전해져서 나의 감성이 되었다. 초록색 자연 속에 들어가면 마음이 열리고 알록달록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며칠 전 모친과 함께 방문한 불암산 나비공원에도 그랬다. 철쭉동산의 꽃들을 보니 너무 신이 났다. 같이 찍은 사진을 보니 모친보다는 내가 더 신나하는 표정이었다. 평소에 모친과 통화를 해보면 자식은 아무리 커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직도 자식 걱정을 하는 것이 느껴진다.
다섯째, 건강을 위해 운동을 꾸준히 한다. 모친은 이십 대에 '황달'이라는 병을 앓으셨고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다고 하셨다. 하지만 젊은 시절 수영을 통해서 그 병을 이겨내셨고 꾸준히 수영을 이어가셨다. 나도 모친을 따라 수영을 배우고 가끔 같이 수영장도 갔지만 모친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어느 시절인지는 몰라도 모친은 더 이상 수영을 안 하시고 주부 대학 산악회에 나가시기 시작했다. 모친은 등산에 다녀올 때마다 나에게 등산용품을 하나씩 장만해 주기 시작했다. 그 등산용품들은 내가 등산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수영도 수준급이고 등산도 수준급이셨던 모친이 이제 올해로 일흔일곱이 되신다. 요즘은 등산을 안 하셔서 그런지 몰라도 정상을 오르는 등산을 버거워 하신다. 시간이 될 때마다 모친과 함께 둘레길을 같이하고 싶다. 그리고 올여름에는 모친 모시고 오랜만에 수영장도 같이 가보고 싶다. 앞으로도 쭈욱 건강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강미화 여사,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