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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인 Oct 14. 2024

11. 요절이 꿈이었던 69세 탈옥수의 마지막 계획

호상

 #진강석 - 과거 회상 중

 운전을 이어가던 진강석은 자연스레 누군가를 떠올린다.


 5년 전, 진강석이 경찰이 아닌 교도관으로 일할 때였고, 그 일을 겪기 전이었다.


 “교도관 관두고 저기 정선에서 포커라도 치려고?”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진강석은 만지작거리던 트럼프 카드를 황급히 숨겼다.


 “……말 걸지 않습니다.”


 진강석은 건조한 눈으로 말을 걸어오는 수감자를 쏘아봤다.


 여태 체육활동 시간에 개인적으로 말을 걸어온 수감자는 없었다.


 그는 수감자의 얼굴을 지그시 쳐다봤다. 눈에는 약간 사시 조짐이 보였고, 끊임없이 코를 훌쩍였다.


 진강석이 물었다.


 “수감번호 6789, 따로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습니까?”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이수광이 어깨를 으쓱하며 습관적으로 웃음을 흘렸다.


 “카드 돌리는 연습이라도 하고 있나, 해서.”


 “지금은 체육활동 시간이지 교도관에게 질문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할 일 없으면 저쪽 벤치에 가서 햇볕이나 쐬십시오.”


 “일광욕하라고? 그거 괜찮겠네!”


 이수광은 손차양을 만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교도관에게는 반말하지 않습니다.”


 진강석이 딱딱한 어조로 지적했다.


 “그것도 괜찮고!”


 교도관의 엄숙한 태도에도 이수광은 아랑곳 않고 친한 척 굴었다.


 “요새 날씨가 참 좋아, 그치?”


 30년이 넘게 나이 차가 나는 수감자에게까지 열을 뻗칠 이유는 없었던 진강석은 한결 누그러진 얼굴을 한 채 우호적으로 대답했다.


 동시에 수감자의 가슴팍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얀색 명찰.

 최소한 사람을 크게 해친 죄로 들어온 수감자가 아니라는 사실도 나름의 이유로 작용한 것이리라.


 진강석이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냥 손이 심심해서 만지작거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수감자가 가지고 있던 거 압수한 거예요.”


 “그래? 내 듣자하니 새벽마다 직원용 휴게실에서 판이 꽤 크게 벌어진다고 했던 거 같은데. 자네도 종종 끼고 그러나?”


 “아니요. 도박에는 관심 없습니다. 소질도 없고요. 해봤자 다 잃을 겁니다.”


 “으음, 아닐걸?”


 이수광은 망설임 없이 대답하고는 껄껄 웃었다.


 진강석은 교도소 규정에 적합한 미소를 입가에 계속 걸고 있으려고 노력했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수감자에게 친절하되 친밀하지 않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한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이수광과의 두 번째 만남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진강석이 운동장 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햇빛을 받고 있는 이수광에게 다가갔다. 


 “요새도 카드 만지작거리면서 시간 때우고 있나?”


 “아니요. 요새는 그냥 있습니다. 시간이 잘 안 가서 큰일입니다. ……하하하.”


 오랜 친구에게 투정부리듯 진강석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해댔다.


 “나랑 다를 게 없네.”


 “그러게 말입니다.”


 진강석은 대화 중에도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늙은 수감자를 힐끗대며 가볍게 물었다.


 “잘 지내시죠?”


 “비염을 얻었다는 거 말고는 비교적 잘 지내는 편이지.”


 이수광은 그렇게 담담하게 말했고, 그 태도에서 느껴지는 의외의 느긋함에 진강석의 마음이 살짝 더 풀어졌다.


 그날부터 진강석은 왜인지 모르게 이수광을 가만히 지켜보기 시작했다.


 왕년에 꽤나 잘나갔다는 소문이 자자한 다 늙은 털이범을 관찰해서 뭐하나 싶다가도 저절로 눈이 갔다.


 이수광은 언제나 하늘을, 정확히 말하면 하늘 위에 떠있는 구름을 쳐다보고 있었다.


 교도소 생활에서 하루 40분.


 온전히 바깥공기를 맛볼 수 있는 체육활동 시간만 되면 그는 언제나 고개를 하늘로 치켜든 채 꾸물꾸물 흘러가는 구름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진강석은 그런 그의 모습에서 지긋한 노인의 검소한 전원생활을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하고, 세상만사에 통달한 현자의 깊은 사색을 염탐하는 기분에 휩싸이기도 했다.


 새하얀 구름과 머리칼이 죄다 허옇게 세어버린 늙은 수감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진강석은 안심이 되고 차분해졌다.


 “탈옥…….”


 상념에서 빠져나온 진강석이 액셀을 반복적으로 밟아가며 중얼거린다.


 소파에 대충 널브러져 두 시간 남짓 누워있던 게 전부였지만 오히려 점점 더 정신이 말똥해지고 몸에 힘이 넘쳐나는 느낌이다.


 미열에 잠식되어가기라도 하듯 기분 좋게 몸이 달아오른다.    


 



 #양태호 - 업무 지시 중

 급히 부하들을 불러 모은 양태호 사장이 일사불란하게 지시를 내린다.


 “내일모레 칠십 인 노인이고, 키가 작고 말랐어. 얼굴 사진은 핸드폰으로 확인하고. 각자 흩어져서 샅샅이 뒤져봐.”


 “만약 찾으면 어떡합니까?”


 평소 궁금한 거라면 망설이지 않고 묻는 조직원1이 번쩍 손을 들고 묻는다.


 끼어들기 좋아하는 조직원2가 끼어든다.


 “당연히 죽여야지! 너는 재미없게 뭘 그런 걸 물어보냐.” 


 “죽이는 건 너무하지. 그래도 노인인데. 죽기 직전까지 패는 걸로 해.”


 소외되는 걸 싫어하는 조직원4도 한마디 거든다.


 양태호 사장은 부하들의 저급한 대화 수준에 아쉬운 마음을 담아 길게 한숨을 내쉰다.


 일머리는 다소 부족하더라도 몸 하나는 잘 쓰는 부하들이니 아쉬워도 별 수 없다.


 “만약이 아니라, 반드시 찾아서 절대 죽이지 말고, 나한테 바로 데려와. 굳이 팰 것도 없잖아? 다 늙은 노인네 데려오는 건데. 괜히 힘쓰지 말자고.”


 “근데 그 노인은 왜 그렇게 찾으시는 겁니까? 옛날에 유명했던 도둑이라던데. 혹시 도둑맞은 거라도 있으십니까?”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조직원5가 드디어 질문다운 질문을 한다.


 도둑맞은 물건은커녕 외려 이쪽에서 도둑질을 할 예정이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던 양태호 사장은 부하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남자라면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는다.

 사뭇 심각한 목소리로.


 “도둑맞았지……. 내 청춘을 훔쳐갔다.”


 “청춘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부하들의 의욕이 최고조로 치닫는다.  





 #이수광, 홍준영 - 업무 회의 중   

 “근데 영감님은 언제 도둑이 돼야겠다고 생각하셨어요?”


 텅 빈 잔을 만지작거리며 홍준영이 묻는다.


 “첫 번째 도둑질이 끝나고 두 번째 도둑질을 계획할 때?”


 “처음에 했던 도둑질은 뭐였는데요? 여자의 마음을 훔쳤다, 뭐 이런 재미도 없고 현실성도 없는 얘기 말고요.”


 “재미도 없고 현실성도 없어서 말 안 해줄란다.”


 이수광은 미약한 웃음을 내보인다.


 홍준영이 대뜸 묻는다.


 “영감님, 그럼 꿈같은 건 없었어요? 지금이라도 도전해보시면 어때요? 요새는 칠십이면 새 장가도 간다던데.”

 

 “웬 꿈?”


 이수광이 홍준영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철들지 마라. 그런 낭만적인 생각 말고 그냥 살아.”


 “그러는 영감님은? 영감님 인생이야말로 제일 낭만적인 거 아닌가? ……세상에 내가 탈옥한 사람을 다 만나보네.”


 “시끄럽고, 내가 시킨 일이나 잘해.”


 “예예. 영감님한테 배운 대로만 하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리고 제자야, 내 꿈은 못 이뤄. 내가 너무 늙어버렸거든.”


 이수광이 의외의 진지함이 엿보이는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말한다.


 “뭔데 그러세요? 늙었다고 못 이루는 꿈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한번 말해보세요.”


 “요절.”


 “……아, 호상도 아니고 요절은 좀……."


 뒤통수를 긁적이던 홍준영이 차선을 제시한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호상으로 바꾸시는 게 어떠세요?” 


 “네가 내 꿈을 대신 이뤄주는 방법도 있을 거 같은데?”


 이수광은 그 말과 함께 껄껄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에게는 할 일이 있다.


 탈옥을 결행할 만큼 막중한 일이.


 그때, 초인종 소리가 온 집안을 휘감는다.    


 



 #강신영 - 통화 중

 강신영의 핸드폰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응답한다.

 번쩍하고 배경화면이 모습을 드러낸다.


 5년 가까이 사용한 핸드폰은 가끔 그러는 법이다.


 그의 어깨에 폭 안긴 두 명의 딸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다.


 대학교 입학식 때 같이 찍은 사진이다.


 아무리 어색하고 사랑 표현에 인색한 부녀관계라도 가끔씩은 그러고 싶은 법이다.


 카메라 앞에서 과감해지는 건 연예인들만이 아니다.


 소중하고 가슴 아픈 추억이 담긴 사진을 미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강신영 소장은 경보음처럼 울리는 벨소리에 기겁한다.


 “예, 강신영입니다.”


 신분을 밝히자마자 상대방으로부터 폭탄 같은 소식이 전해져온다.


 통화를 이어가던 파출소장은 한 박자 호흡을 내쉰 뒤 대답한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실제상황이라는 말씀이죠?”


 몇 번이고 생각해봐도 어처구니없는 농담이라는 듯 도리질을 친다.


 “…….”


 통화를 마친 강신영은 짧은 고민 끝에 모든 경관들을 불러 모은다.


 그 명단에 진강석 경장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진강석 - 황당해하는 중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문을 두드린 진강석은 그 설마 하는 인물이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니 패닉에 빠진다.


 “어, 진강석이. 오랜만이네?”


 태평한 이수광의 인사에 진강석은 당황스럽지만, 일단 예의바르게 고개까지 숙여가며 인사를 건넨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어, 너는 예의를 꼭 이렇게 행동으로만 보여주더라. 막상 말은 함부로 하면서.”


 이수광은 반말과 막말을 일삼는 첫 번째 제자에게 볼멘소리를 낸다.


 진강석이 이수광을 빤히 응시한다.


 “근데, 교도소에 계셔야 할 분이 왜 제 눈앞에 있는 걸까요?”


 “……알고 온 게 아니구나?”


 제자의 무관심에 이수광은 서운하다.


 외려 스승의 소식을 다른 사람 입을 통해, 그것도 탈옥수로 등장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진강석이 다소 딱딱한 어조로 말한다.


 “혹시나, 하고 와본 겁니다. 스승님이랑 연관 지을 수 있는 장소가 여기뿐이라. 그나저나, 도대체 거기서 어떻게 나오셨어요?”


 “왜 나온 지가 궁금한 거야, 아님 어떻게 나왔는지 그 방법이 궁금한 거야?”


 “일단 왜부터 하죠. 방법이야 뭐, 이미 나온 마당에 어떻게 나왔는지 그리 궁금하진 않네요.”


 진강석의 눈이 수사할 때처럼 날카로워진다.


 “일단 들어와.”


 이수광이 비켜서며 집안을 가리킨다. 아무리 급한 일이라지만 제자와의 재회를 이렇게 끝낼 순 없는 법이다.


 그 옆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홍준영은 인사할 타이밍을 못 잡고 있다.


 “듣는 게 먼저에요. 제가 다시 모시고 갈 수도 있어요. 말씀 잘하세요.”


 순간 이수광의 표정에 낭패감이 스치는 것을 경찰인 진강석이 놓칠 리 없다.


 “……설마 아무 생각 없이 나온 거예요?”


 매정한 제자의 말투에 이수광은 서운함을 넘어 쓸쓸함을 느낀다.


 “할 일이 좀 있어.”


 “얼마나 대단한 일이면 탈옥을…….”


 “에어컨을 안 끄고 갔어.”


 어떤 상황에서든 습관적으로 익살스러운 농담을 짜내는 고약한 버릇을 소유한 이수광은 자신의 감각 있는 농담에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억누를 수 없다는 듯 끽끽댄다. 


 “……장난하십니까?”


 “쩝, 이건 장난이고.”


 제자의 얼굴에 분노의 기미가 보이자 표정을 싹 바꿔 끼우고 이수광은 하는 수 없다는 듯 해결책을 제시한다.


 “강석이 네 입장이 난처한 거면, 일단 교도소 대신 너랑 같이 가서 경찰서 유치장에라도 들어가 있을까? 어때?”


 “그게 무슨……. 유치장이랑 교도소는 아예 다른 곳이에요.”


 “어쨌든 창살은 똑같잖아.”


 진강석이 말도 안 통하는 일곱 살 조카와 하루를 보내야하는 삼촌의 심정으로 이수광을 쳐다본다.


 그 와중에 다행인 점이 있다면, 어렴풋하게나마 이수광의 두 눈동자에서 교교히 타오르고 있는 삶에 대한 충실한 자세가 엿보인다는 것이고, 대한민국 어떤 경찰보다 본인이 가장 먼저 탈옥수 신세가 된 이수광을 마주했다는 점이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탈옥을 결행한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름대로 계획이 있는 것 같은데, 그리 바람직한 장르는 아닐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이 든다.


 “……일단 들어가서 마저 얘기하시죠.”


 그제서야 진강석이 신발을 벗고 집에 들어선다.


 “그래그래.”


 이수광도 한숨 돌렸다는 듯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중얼댄다.


 “아이고, 탈옥도 제자 놈 눈치보고 해야 하다니. 피곤하다, 피곤해. 난 네가 나 다음가는 대도라도 될 줄 알았는데, 대뜸 경찰이 될 줄이야.”


 “경찰하다가 잘 안 풀리면 나중에라도 생각해볼게요. 경찰에서 도둑 되는 건 하나도 안 이상한데, 도둑이 경찰되는 건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되잖아요.”


 “그것도 그렇긴 해!”


 이수광은 오랜만에 만난 제자가 어지간히 반가운지 얼굴에 흥분이 가득하다.


 “야, 준영아 커피 좀 준비해줘라.”


 “예? 아, 예…….”


 순식간에 들러리가 된 홍준영이 물을 끓이고 찬장에서 잔을 꺼내 커피를 준비한다.


 “쟤는 뭡니까? 아는 애?”


 진강석의 무신경한 호칭 사용에 살짝 뚜껑이 열린 홍준영이 삐딱하게 응대한다.


 “초면에 쟤나 애는 좀 그렇고, ……홍준영입니다. 그러는 그쪽은 이름이 뭡니까?”  


 진강석은 먼저 이름을 밝혀오는 상대방을 무시하고 이수광 쪽으로 아예 고개를 돌려버린다.


 “예? 선생님? 설명 좀 해봐요. 누군데?”


 “……거참, 첫인상 인상적이시네.”


 홍준영은 이미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다.


 이수광이 날이 바짝 서있는 진강석을 나무란다.


 “내가 이상한 놈이랑 붙어먹었을까봐 그러냐? 왜 이리 삐딱하게 굴어?” 


 “내 성격 삐딱한 게 하루 이틀이에요? 아, 그래서 누군데요?”


 “귀가 좀 안 좋으신가?”


 홍준영이 조롱 섞인 투로 말한다.


 “아니면 기억력이 안 좋은 편이던가. 홍준영이라고 방금 말했는데.”


 그제야 진강석의 시선이 홍준영에게 닿는다.


 “홍준영이 뭔데?” 


 “내 제자다, 이 싸가지 없는 놈아. 이거 이거, 성격이 더 더러워졌네.”


 이수광이 다루기 까다로운 개를 타이르듯 말한다.


 진강석의 표정이 조금, 아주 조금 누그러진다.


 “내 이름은 아까 들었을 테니까 인사는 한 걸로 합시다. 기억하죠? 아, 혹시 귀나 기억력이 안 좋은 편인가? 그럼 다시 말해주고.”


 “영감님, 커피 진하게?”


 홍준영이 부러 모른 척한다.


 “거기 손님은? 취향을 모르겠네. 알아서 타서 드세요.”


 “둘 다 생각보다 되게 유치하구나? 금방 친해지겠어.”


 제자들의 기싸움이 흥미로운지 이수광의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진강석은 매섭게 홍준영을 응시한다.

 말의 의중을 탐색하기보다 뭐 하나 꼬투리 잡을 거 없나, 하는 불순한 눈빛이다.


 반면, 홍준영은 그런 진강석의 매서운 눈길을 요리조리 피하며 잔을 나른다.


 “준영이 너도 앉아라. 같이 얘기 좀 하게. 아까 했던 얘기 다시 해야겠다. 졸지에 일행이 늘어났네?”


 “그럼 이 사람도 같이 하는 건가? 영감님이 말한 그 민중의 지팡이?”


 홍준영이 비웃음을 흘린다.


 “지팡이로 사람 한번 잘 패게 생겼는데.”


 오늘 처음 만나는 동성의 외모 품평에 진강석은 기가 차면서도 그리 틀린 말은 또 아니라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근데 안 추우세요?”


 그는 다시 이수광에게 관심을 돌린다.


 제아무리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지구가 뜨거워졌다지만 10월 말 날씨에 죄수복만 입고 다니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아, 어쩐지 춥더라. 옷 좀 갈아입고 올 테니까 싸우지들 말고 얌전히 있어. 그리고 준영아, 혹시라도 얘한테 덤빌 생각이면 관두는 게 좋을 거야. 저 놈 손이 많이 맵거든.”


 이수광은 그전까지는 추위라는 개념을 몰랐던 사람처럼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며 부엌을 빠져나간다.


 “애들도 아니고 뭘 싸웁니까. 제가 혼내면 혼냈지.”


 진강석이 가감 없이 상대방을 깔본다.


 그 가벼운 말 한마디가 수감생활을 할 적에 다 녹아 없어진 줄 알았던 홍준영의 자존심에 실금을 낸다.


 그래도 먼저 덤벼들 재주는 없다.


 꽤 긴 침묵 끝에 홍준영이 묻는다.


 “영감님한테는 어쩌다 배우게 된 겁니까? 나 같은 경우에는 내가 먼저 들이댔는데.”


 “그 말은, 전부터 선생님이 누군지 알고 있었던 거야?”


 “당연하죠. 「이수광의 이럴수광」이 내 인생 최고의 책인데. 읽어봤습니까?”


 진강석의 얼굴이 굳는다.


 “……그게 책 제목이라고? 아니, 무엇보다 저 양반이 무슨 재주로 책을 쓰지?”


 “저희 업계 전설적인 선배님한테 저 양반이라니. 말 가려서 하세요.”


 “제목을 지어도 어쩜 그런 제목으로……. 전혀 읽고 싶지 않은 제목인데.”


 “이럴수광!”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은 이수광이 정체불명의 감탄사를 내뱉으며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재미없어……? 고도의 말장난인데.”


 “선생님, 일단 앉아서 아까 하던 얘기부터 마저 해주시죠. 저 이따가 연락 오면 바로 나가봐야합니다.”


 진강석이 한숨을 내쉰다.

 그 깊은 한숨이 의도치 않게 하나뿐인 스승에게 상처를 준다. 


 “잠깐, 커피만 마저 마시고.”


 그 말과 함께 이수광은 호들갑스럽게 커피를 홀짝인다.


 커피만 마시자니 입이 심심했는지 주머니에서 대뜸 마지막 남아있는 새콤달콤을 꺼내 질겅질겅 씹어 먹는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잔이 바닥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이수광은 지겹지도 않은지 연신 커피 잔을 만지작거린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제자 중 하나가 불쑥 화두를 연다.


 “저, 영감님? 이제 말씀하시면 될 거 같은데요? 들을 준비됐어요.”


 “준비는 진작에 됐지.”


 진강석은 입영통지서를 낭독하듯 의욕 없이 중얼거린다.  


 “음, 딱 좋아.”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던 이수광은 15년 전에 해치운 작업의 어려움을 언급하는 것으로 말머리를 뗀다.


 “내가 일본으로 출장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물건 하나를 훔쳤어. 그게 타이쇼 시대 때 정부에서……”


 귀에 쥐가 날 정도로 열심히 듣고 있는 사연이 탈옥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차분하게 고민을 이어가려했으나, 그전에 진강석의 짜증이 먼저 터져버린다.


 “선생님, 저 바쁘다니까요? 용건만―”


 “어어, 거의 다 끝났어.”


 이수광이 진강석의 말을 끊고 마치 어제 일을 얘기하듯 사실감 있게 설명을 이어간다.


 진강석은 말의 파도에 휩쓸리기라도 하듯 눈을 질끈 감고 식탁을 부여잡는다.


 이어지는 순서는 이수광의 전설적인 성공담이다.


 오랜 경력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에피소드는 영화를 방불케 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스케일은 커지고 장르도 다양해진다.


 도둑질이 이렇게나 많은 장르와 결합될 수 있다니.


 홍준영은 놀라울 따름이다.

 그간 자기가 했던 작업들은 애들 소꿉장난처럼 여겨진다.


 반면 진강석은 스승님의 순수한 범행 자백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어디부터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개소리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만약 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 스승님의 여생은 그리 전망이 밝아 보이지 않는다.


 듣는 이의 직업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수광의 화려한 무용담은 한참 동안 이어지더니 드디어 핵심에 도달한다.


 요는 계획은 다 세워놨으니 숟가락만 얹으라는 소리다.


 이수광이 연출과 극본, 감독에 제작투자까지 맡은 이 프로젝트의 개봉일은 오늘 오후이고, 장르는 의외로 복수극이다.


 중구난방으로 뻗어가는 이수광의 말을 한데 잘 모아 차근히 들어보면, 신기하게도 하나의 계획이 형태를 갖추고 있다.


 생각 외로 꽤 그럴싸하고 놀랍게도 진지하다.

 하지만, 역시나 위태롭고 불완전하다.


 각자 고민을 이어가던 두 제자는 신기하게도 똑같은 시점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 모습을 스승이 먼저 알아챈다.

 이수광이 버럭 목소리를 높인다.


 “이, 이것들이 눈깔이나 딱딱 맞추고 있고! 네 놈들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다 계약 위반이야. 알아?”


 “계약서 있어요?”


 진강석이 전문분야를 살려 질문한다. 대단히 합리적인 질문이다.


 “……계약서? 내, 내 방에!”


 “그 영감님 방이라는 게 이 집에 있는 방은 아닌 것 같은데요.”


 홍준영이 가세한다.


 스승님이 말하는 방이라는 곳은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


 한 번 들어가면 집주인 성이 풀릴 때까지 못 나오는 곳.

 오죽하면 나서기 좋아하는 철수가 방이 아니라 가방에 들어갔을까.


 “그래서 안 하겠다고? 세상에 딱 둘 뿐인 제자 놈들이 스승님 마지막 부탁 하나 못 들어주겠다는 거여 지금? 그런 겨?”


 “왜 갑자기 안 어울리게 충청도 사투리를 쓰고 그러세요. 서울에서 나고 자라셨잖아요.”


 진강석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관자놀이를 긁적인다.


 “아이! 그래서! 할 겨, 말 겨? 딱 말혀.”


 “……할 겨.”


 두 제자는 미심쩍은 얼굴로 대답한다.


 제자들의 동참이 마냥 좋은 이수광이 새로운 커피에 입을 댄다.


 “음, 좋아. 커피나 한잔 더 하고 슬슬 출발해보자고.”


 “근데 영감님, 왜 하필 당장 오늘부터 시작하는 겁니까? 너무 빠듯하지 않아요?”


 진강석이 묻는다.


 “내가 아침 신문에서 오늘의 운세를 봤는데. 좋은 일만 가득하다고 했어. 이런 날 작업해야지 언제 해? 안 그래?”


 이수광이 같은 직업적 고민을 공유하고 있을 것 같은 홍준영에게 동의를 구한다.


 까마득한 후배 도둑이 무성의하게 고갯짓을 한다.


 “예, 뭐…….”


 “그건 그렇고, 경찰이 보기에는 내 계획, 어떤 거 같아?”


 이수광이 새삼 평가를 원한다.


 진강석은 경찰 된 입장에서 그 질문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는 언급할 수 없다며 얼버무린다.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로서 어디까지나 국가의 공공질서와 국민의 안녕을 수호할 의무가 있단다.


 "뭐……, 괜찮을 것 같네요."


 다만 접근방식 자체는 몹시 매력적이었음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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