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이 물에 빠졌다. 수십 년 만에 큰 물 지어 마을 앞 세월교 난간이 찢겨나가고 사촌동생 볏논이 반쯤이나 붉덩물에 잠겨 넘실거리고 있었다. 작년 겨울 숙부님 돌아가시고 장가 못 간 노총각 혼자 지은 농사가 홍수에 휩쓸리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모가지까지는 잠기지 않아 큰 피해는 없어요, 형님.”
물에 잠긴 논을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동생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하지만 팔짱을 끼고 논두렁길을 걸어가는 그의 모습에는 어딘지 모르게 실망과 야속함이 묻어 있었다. 자신이 뭔가를 잘못해서 이렇게 된 것도 아닌데 힐끗힐끗 나를 보며 겸연쩍어한다. 혼자서도 농사 잘 지어 올 겨울 숙부님 제사상에 따뜻한 밥 한 그릇 올리겠다던 그의 다짐이 어긋날까 봐 그런 것일 게다. 형님들에게 면목을 세워 자랑도 하고 칭찬도 받고 싶었던 동생이다.
“내가 죽으면 자네가 저놈 좀 가끔 살펴봐 주게나.”
숙부님은 돌아가시기 전 나에게 몇 번이나 당부했다. 자식을 저렇게 두고 가는 것이 부모가 할 짓이 아니라며 가슴 아파했다.
“내가 저승에 가서도 저놈이 눈에 밟힐 거여.”
“갸도 이제 나이가 40이 넘었어요.”
다 큰 놈을 쓸데없이 걱정하신다고 말해보지만 숙부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의 요량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못마땅한 것이다. 아들딸 여섯 낳아 모두 도시로 보내고 숙모님과 농사를 지으면서도 숙부님은 크게 힘들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3년 전 숙모님이 돌아가신 후 숙부님의 삶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당신의 삶을 정리하고 마무리할 때가 왔음을 느끼셨는지 결국 일정한 직업 없이 큰아들네 집에서 얹혀살던 막둥이를 불러들였다. 농사일을 가르쳐 농토를 물려주고 결혼도 시켜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숙부님의 마지막 꿈이 영그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요즘 농사는 기계가 알아서 해주니까 일도 아녀. 근데 저놈 장가보내는 일은 하느님도 어려운가 보더라.”
가뭄에 비 기다리는 것보다 막둥이 결혼 성사를 더 간절히 바랐던 숙부님은 끝내 막둥이 장가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추수 끝내고 사촌동생은 가을보리를 심었다. 보리 심는 일이 오래전부터 보기 드문 일이지만 숙부님은 해마다 가을보리를 심었고 사촌동생도 숙부님을 따라 했다. 하지만 사촌동생이 도시에서 내려와 농사를 짓기 시작한 작년 봄 만해도 그는 논두렁에 서있는 벅수였다. 농사일을 어떻게 할 줄 몰라서도 그랬지만 여전히 도시 사람의 기준으로 머리가 돌아갔고 농사에 대한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떤 때는 논밭에서 들려오는 부자(父子) 간의 고성이 섬진강에 울리기도 했다.
“이까짓 보리 심어 몇 푼이나 번다고 이런 귀찮은 일을 왜 하고 그래요?!”
“땅 파먹고 사는 농사꾼이 땅 파는 걸 싫어해, 이놈아!”
도시로 보내기 전 품 안에서 20년을 키우면서도 숙부님은 막둥이를 논밭에 불러낸 적이 거의 없었다. 논밭 몇 뙈기 갈아먹는데 어린 자식까지 손에 흙 묻히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또 다른 20년을 도시 물만 먹고 온 자식에게 흙 파먹고 살라고 소리치자니 자꾸 고함소리가 목에 걸린다. 그래도 내년에는 그동안 모아 놓은 돈도 조금 있고 보리 공판 내어 보태면 막둥이 결혼자금을 얼추 만들 수 있다. 숙부님의 고함에는 기대와 희망이 버무려져 있었다.
“해가 겁나게 짧아졌다. 어서 끝내고 들어가자!”
숙부님은 흙 파먹기 싫다는 막둥이 아들과 그렇게 마지막 가을보리를 심었다.
“아부지가 보리 공판 내서 돈 좀 모으면 올 가을에 장가보내준다고 하셨는데 아부지도 안 계시고 코로나도 와서 올해도 틀렸네요.”
숙부님은 국제결혼 중개업체를 통해 막둥이 신붓감을 구하러 두세 번 시도해봤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래저래 안 되는 쪽으로만 이야기가 흘러갔고 괜히 아들놈 기만 죽였다고 불평하셨다. 사촌동생은 숙부님이 돌아가신 후 혼자서 모든 살림을 도맡아 했다. 숙부님 말씀대로 농사의 많은 부분은 기계가 해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특한 것은 20년 넘게 몸에 베인 도시 사람 태를 굳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사촌동생이 귀향하고 어느덧 섬진강에 두 번째 겨울이 내려오고 있었다. 지난여름 붉덩물이 남긴 상처가 아직 여기저기 그대로 남아 있어 발길에 차이고 눈길에 걸린다. 굳어버린 물때가 게딱지처럼 붙어있는 바윗돌은 다시 한 번 큰비가 와서 씻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언제부턴가 멀대 같은 왜가리 한 마리가 강가에서 멍 때리고 서있는데 청둥오리들이 그 앞을 한가롭게 유영하고 있다.
“형님, 가을보리 괜히 심었나 봐요.”
고추밭을 정리하고 마른 고춧대를 태우고 있는 사촌동생이 버릇처럼 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혼자 힘으로 농사를 지어 곡식과 과일을 수확하는 기쁨에 제법 자신감도 붙었던 그가 웬일인지 어깨가 처져있었다.
“저는 뭘 해도 꼭 안 되는 때를 찾아서 한다니까요. 아부지가 물려준 논 제 손으로 처음 농사짓는데 몇십 년 만에 큰비가 쏟아지질 않나, 맘먹고 아부지 따라 가을보리를 심어 놓긴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큰형님 집에서 살 때도 이것저것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어요. 근데 뭔가 꼬이고 일그러지고 제대로 된 것이 없었어요. 사실 아부지가 내려오라고 했을 때 은근히 좋았어요. 큰형님께 신세를 지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서.”
고춧대 몇 개를 불 속에 집어넣으면서 나는 사촌동생에게 숙부님이 하셨던 말씀을 전해주었다. 특히 숙부님이 가을보리를 심으면서 하신 말씀이 나에게도 깊이 있게 다가왔던 기억이 났다.
“우리는 가을에 고개 숙인 벼이삭을 보고 그것을 교훈 삼아 말하는데, 벼이삭은 제 무게에 겨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야만 되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고개가 부러지거든. 그런데 보리 이삭은 시종일관 고개를 쳐들고 있고 익을수록 더 뻣뻣해지지. 또한 벼는 한여름 뜨거운 태양빛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고통이 있지만 안락한 물속에 있으니까 그게 가능해. 물이 없으면 보타 죽어. 그러나 가을보리는 엄동설한을 스스로 이겨내지 않는가. 그래서 꿋꿋하고 당당한 거야!”
“그러고 보니까 형님, 큰 물 불어 논이 침수됐어도 피해는 없었어요. 그리고 뉴스를 보면 코로나가 와서 경제가 어렵다고들 하는데 코로나 그것들이 우리 가을보리를 어찌하겠어요?”
사촌동생은 고춧대가 타는 모닥불 너머 저 아래 보리밭으로 눈길을 돌린다. 보리밭 어딘가에서 터져 나온 숙부님 고함소리가 섬진강으로 울려 퍼진 듯 청둥오리 한 무리가 하늘로 날아오른다.
*아부지: 아버지의 방언
*벅수: 장승을 달리 이르는 말
*보타 죽다: ‘말라죽다’의 방언(전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