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떠난 혼자 여행
혼자 하동으로 떠났다. 그러기로 한 이유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퇴사 후 어디라도 떠나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것 같아서. 여행하는 동안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힐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어쩌면 이 여행을 통해서 퇴사를 한 나의 결정이 옳았다는 답을 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불안했으니까.
퇴사 후 다음날 아침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안녕하세요." 그동안 너무 찌들어 있었나? 버스 기사님이 건네는 짤막한 인사가 낯설었다. 기사님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여유와 친절, 승객 한 분 한 분께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새삼 놀라우면서 감동적이까지 했다. 기사님도 분명 여러 유형의 사람들과 인생의 굴곡을 겪고 있을 텐데도 따뜻한 모습을 유지하고 계신다는 게. 이런 작은 인사 한 마디에도 쉽게 감동을 받는 이 마음을 통해서 그간 얼마나 회색빛 세상 속에 갇혀 살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아니면 한적한 시골 풍경이 사람의 마음을 저렇게 여유롭게 어루만져 주는 건가? 어쩌면 나도 조금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닐지, 하동으로 가는 길에 기대감이 더해졌다.
몇 시간을 달렸는지 모른다. 어느덧 내가 하동과 가까워져 간다는 것은 어느샌가 바뀌어 있는 창밖 풍경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점점 높은 건물들이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산이 보이고, 갈대밭이 보이고... 그리고 섬진강이 보였다. 하동은 벚꽃이 필 때 정말 아름답다던데, 굳이 꽃이 만개하지 않더라도 윤슬이 반짝이는 섬진강만 바라보아도 충분히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탁 트인 풍경에 매료되어 창밖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덧 긴 버스 여행이 끝났다. 아쉽지만 이제 아늑한 버스 좌석에서 몸을 일으켜 본격적으로 하동을 모험할 시간이었다.
화개장터는 여전히 북적북적했다. 하동을 처음 방문한 이후로 약 5년 정도는 흘렀는데, 그간 여전한 모습으로 정겨운 분위기를 띠고 있어 반가웠다. 계획이라고는 계획 없이 그냥 발이 이끄는 대로 돌아다니는 것이 전부였던 나는 이곳에서 수수부꾸미를 사 먹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어르신들의 정겨운 놀이터 같은 이곳 분위기를 주욱 둘러보다가 다시 섬진강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더 야심찬 계획이 머릿속에 하나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재첩 정식을 야무지게 해치우겠다는 계획이었다. 사진을 보니 다시 군침이 돌 만큼 반찬을 포함해 모든 음식이 다 맛있었다. 크게 특별한 맛은 아니었지만 여행 버프 덕에 더욱 맛있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여행을 할 때 나름 지키는 철칙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지의 것을 제대로 즐기자'였다. 여행지에서만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을 체험하자는 생각이 있기에 어디서나 흔히 먹는 음식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하동에서의 첫 끼로 재첩 정식을 선택한 것이었다. 여태 혼자 여행 경력을 토대로 혼밥 레벨이 어느 정도 상위 수준이라 생각했는데, 간만에 혼자 하는 여행이라 그런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기 전까지도 앞에서 쭈뼛쭈뼛거렸다. 이전 여행에서는 가족 단위로 식사하는 곳에 혼자 당당히 앉아 음식을 씩씩하게 해치우기도 했으면서 말이다. 혼자 온 손님인지라 그런지 직원 분들의 관심도 한몸에 받았다. "어이구, 혼자 대단하네!", "맛있으세요?" 등등 신경을 써 주신 덕분에 처음에는 몹시 어색해 재첩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몰랐는데, 어느덧 혼자서 고개까지 끄덕여 가며 음미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든든하게 식사를 마치고 나와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막연히 생각했다. 무계획, 그것이 나의 계획이었으니까. 그러다 문득 숙소 근처에 녹차밭 풍경과 함께 차를 마실 수 있는 다원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래, 그곳으로 가 보자. 어차피 하동은 대중교통으로 군데군데 위치한 관광지로 이동하기엔 불편한 곳이었다. 배차 간격도 길고, 운행 횟수도 적기 때문이었다. 뚜벅이인 나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숙소 근처에서 노는 것이었다. 악양, 나의 숙소가 위치한 이곳은 화개만큼이나 조용하고 고즈넉한 곳이었다. 최참판댁과 동정호도 모두 이곳에 위치해 있었다. 시외버스가 도착했던 바로 그곳에서 마을버스를 기다렸다. 교통카드를 미리 꺼내어 놓을까 하다가 미리 준비해 온 동전주머니에서 100원 하나를 꺼내 한 손에 만지작거렸다. 들리는 소문에 하동 버스는 요금이 100원밖에 하지 않고, 안내원 분들도 계시다고 하던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정 시간에 마을버스가 도착하고 탑승하시는 분들 모두 떙그랑, 하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요금통에 동전을 집어 넣으셨다. 게다가 악양에 가는 버스가 맞냐고 물으니 기사님과 안내원 두 분 다 고개를 끄덕이셨다. 진짜 안내원 분이 계시네. 신기했다. 버스에는 나를 제외하고 모두 어르신 분들이셨는데, 그분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시기 쉽게 이런 시스템이 존재하는구나 싶어서 하동만의 따스한 배려심을 느꼈다.
아, 내가 이걸 위해 하동에 왔구나! 원래라면 평소대로 찌뿌둥하게 일어나 점심 먹고 사무실에 퀭하게 앉아 있어야 할 시간에 햇빛을 마음껏 쬐면서 차를 마시고 있다니. 다원에 와서 차 한 잔을 시켜 놓고 차밭이 잘 보이는 야외 좌석에 앉아 일광욕을 하자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힐링이구나 싶었다. 아직 겨울과 봄 사이의 계절이었는데, 이 날은 유난히 봄스러운 날이었다. 겉옷을 벗어도 될 만큼 따스한 햇빛과 시원하게 불어 오는 바람. 얼마나 시원하게 부는지 작은 물건이 휙 떨어져서 본의 아니게 차밭 사이를 모험하기도 했다. 여태까지는 하동 적응기였다면 이제는 완전히 긴장을 푼 채로 잠시나마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생각에 잠기기보다는 명상에 더 가까웠을까? 가만히 앉아 푸른 풍경을 바라보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러저러한 생각을 관찰하고 있자니 그제서야 조금씩 속이 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 그래. 내가 진짜로 퇴사했네. 처음 제대로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 굴레에서 벗어나 휴식다운 휴식을 하고 있구나. 내가 시킨 차는 우전 녹차였는데, 녹차에도 찻잎을 딴 시기에 따라 종류가 나뉘어져 있다는 사실을 하동에 와서 처음 알았다. 우전 녹차는 4월 말 이전의 이른 봄 시기에 딴 찻잎으로 만든 것으로 맛이 은은하고 순하다고 한다. 실제로 마셔 보았을 때 정말로 은은하고 부드러운 맛이 나서 깜짝 놀랐다. 여태 티백으로 마셔 본 녹차는 하나같이 다 혀끝이 말릴 정도로 쓴맛을 지니고 있었는데, 역시 하동 녹차는 다르구나 싶었다. 녹차라떼에서나 느껴 보았던 부드러움을 여기서 느껴 보다니. 앉은 자리에서 녹차만 5번을 우려 먹었다.
점점 거세지는 바람결을 느끼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소까지 걸어서 삼십 분. 몇 발자국 걸을 때마다 나타나던 그 흔한 편의점조차 쉽게 볼 수 없는 하동이라 미리 근처 하나로마트에 들러 간단한 저녁거리를 샀다. 컵라면, 과자, 제로콜라. 조금 전 마트의 위치를 알려 주셨던 아주머니께서는 아직도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계셨다. 바쁜 도시에서는 항상 조급한 마음으로 버스를 기다렸던 것 같은데. 하동에서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하동은 차분히 기다릴 줄 아는 여유를 가르쳐 주는 곳이었다. 시골 풍경을 양옆으로 두고 쭈욱 걸었다. 갈대가 흔들리는 모습도, 드넓게 펼쳐지는 들판도, 높은 건물 하나 없이 바로 보이는 산도 모두 아름다웠다. 느리게 산다는 건 과연 어떤 느낌일까? 이곳에서는 쿠팡도 되지 않을 텐데. 시골길을 걸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나도 나름대로 도시 사람이 맞나 보다.
어느덧 좁은 골목 사이로 들어서 몇 발자국 더 걷자 예약한 숙소가 보였다. 입구에 보이는 알록달록한 바람개비와 작고 아담한 마당, 군데군데 피어난 개나리까지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저녁 시간이 되기도 전이기에 숙소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까워 짐만 내려 놓고 다시 길을 나섰다. 걸어서 20분만 더 가면 최참판댁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왕 하동에 왔는데 들르지 않으면 서운할 것 같았다. 비록 첫 번째 방문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전에 방문했을 때와 지금의 심정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 있을 것 같아서.
오랜만에 방문한 최참판댁은 여전히 아름답고 고요했다. 기와 지붕에 매달린 풍경 소리를 듣고 있자면 마음까지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최참판댁보다 더 마음에 들었던 경험은 박경리 문학관에 방문한 일이었다. 박경리 문학관은 최참판댁 안에 있어 함께 둘러보기에 참 좋은 곳이다. 이전에 왔을 때는 그냥 스윽 둘러보고 나간 게 끝이었는데, 이번에는 박경리 선생님의 일대기와 여러 작품들을 찬찬히 둘러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글기둥 하나를 붙들고 인생을 사는 것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무엇이든 하나에 몰두해 인생 전체를 바친다는 것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박경리 선생님 작품을 원고지 위에 필사해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태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에 몰두하고 자신 있게 밀고 나간 적이 있었는가? 아니, 애초에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떠올리는 것조차 이젠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최참판댁을 나와 근처 동정호까지 한 바퀴 걸은 후 만보기를 보니 거의 2만보 달성 직전이었다. 발은 아팠지만 걷는 것을 워낙 좋아하는 편이라 높은 숫자에 괜스레 뿌듯해졌다. 왔던 길을 되짚어 다시 숙소에 가 폭신한 침대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자니 진동이 울렸다. 숙소 사장님의 전화였다. 숙소에는 다양한 옵션이 존재했다. 단순히 잠자리만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니라 진공관 앰프로 음악 감상도 가능했고, 조그마한 명상실 이용과 아침 일찍 사장님이 키우시는 강아지들과 산책, 그리고 직접 정성스레 준비해 주신 조식까지 신청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옵션을 욕심껏 눌러 담은 나는 약속했던 음악실 이용 시간이 다가왔다는 사실에 가슴이 들뜨기 시작했다.
우와. 음악실을 들어서자마자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짧은 감탄사였다. 아늑한 조명에 곳곳에 놓여진 LP와 스피커들. 음악 감상이 취미여서 하나씩 모으다 보니 이런 근사한 공간을 만들게 되셨다는 사장님의 말씀에 따라 공간 안은 오롯이 음악 감상에 집중하기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사장님이 직접 만드셨다는 곶감과 손수 내려 주신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 1시간 반 동안 정말 많은 생각이 스쳤고, 질 좋은 휴식을 취했다. 평소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하는지라 고음질로 내가 좋아하는 취향의 음악을 양껏 듣는 이 시간이 하동 여행 중 최고의 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차를 마시며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시간도 좋았지만 이렇게 음악에 잠긴 채로 따뜻한 조명에 둘러싸여 앉아 있자니 더더욱 고요하고 깊게 내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 같아 정말 감사한 시간이었다. 스피커 옆에 마침 삼각대가 있기에 음악 감상을 하는 내 모습을 찍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하이퍼랩스 영상을 찍게 되었다. 브이로그 감성으로 잘 담겼으려나? 기대하는 마음으로 몇십 분짜리의 시간이 1분 미만으로 압축된 영상을 보는데, 내가 원하는 감성이 전혀 안 담겨서 웃픈 스토리가 있었다. 음악에 맞추어 고개를 까딱거리는 모습과 가사를 따라 부르는 모습이 빠르게 재생되어서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담겨 있어서 감상에 푹 젖어 있던 나를 빵 터뜨리는 순간이었다.
숙소에는 한 가지 더 특별한 공간이 있었다. 그건 바로 명상실이었다. 월든에 나오는 오두막을 작게 재현한 이 공간은 두 사람이 들어가면 꽉 들어차고, 한 사람이 들어가기에 딱 알맞은 공간이었다. 나른하게 이곳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에 또 잠겨 봐야겠다, 다짐을 했건만 나는 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인지. 항상 그랬다. 제대로 마음 먹고 명상을 하자고 다짐하는 순간 괜스레 떼를 쓰는 아이처럼 폰이 보고 싶어지고, 오지도 않은 연락을 확인하게 되는 그런 심리. 명상실에서 내일 집으로 돌아가 먹을 것들을 쿠팡으로 야무지게 장 봤다는 사실은 비밀이다. 그래도 나름 명상실에서 1시간 정도 시간을 보냈을까? 시간은 벌써 밤 10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슬슬 숙소로 가서 잠에 들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 나는 마당에서 보이는 악양의 밤 풍경에 눈길을 사로잡히고 말았다.
사진이 실제 풍경을 모두 담지 못해서 아쉬울 따름이지만 평사리 들판 위로 자잘하게 펼쳐진 조명들이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별 같아서 지그시 바라보게 되었다. 사장님께서 아직 잠에 들지 않으셨는지 어느샌가 옆으로 오셔서 악양의 또 다른 밤하늘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사장님은 이 풍경을 악양의 '땅별'이라 부른다고 하셨다. 정말 딱 알맞은 표현이었다. 굳이 하늘을 올려다 보지 않아도 들판을 따라 드넓게 펼쳐진 땅별이라니. 정말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밤하늘에 별이 떠 있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늘과 땅, 모두 별이 떠 있는 곳. 이곳이 바로 악양이었다. 사장님께서는 특히 이곳의 밤 풍경이 아름다워서 악양에 살기로 결정하셨다고 한다. 대략 6년 정도 살고 계신다고 기억한다. 음악 감상이 취미인 것을 토대로 음악실을 만들고, 책에서 감명을 받아 오두막을 집 마당에 그대로 재현하고, 한 장소의 풍경이 마음에 들어 그곳에 정착한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이 다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이렇게 자신의 목소리에 따라 그림을 그리듯 사는 삶도 실제로 존재하는구나. 그것을 몸소 느끼게 되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나도 언젠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부러워만 하는 삶이 아니라 내 안에 꽉 막힌 무언가를 없애고 원하는 대로 내 삶을 그려 나가는 모습.
땅별을 마음 한편에 품은 채 방에 돌아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내일 아침 일정은 무려 7시에 귀여운 갱얼쥐들과 산책 예정이었다. 내가 그 시간에 일어날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지만 오늘 많이 걸으며 체력을 소진했기에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건 바로 오늘 하루 종일 카페인을 평소보다 과도하게 섭취했다는 사실이었다. 낮에 녹차를 5잔을 연달아 마시고, 저녁에 음악 감상을 하며 커피 한 잔을 마셨더니 당최 잠이 오지 않았다. 몸은 엄청 피곤한데 좀비 상태로 각성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겨우 새벽 5시쯤 잠에 들었나? 어찌 되었건 알람 소리에 맞추어 7시에 일어나는 것은 성공했지만 컨디션은 안타깝게도 최악이었다.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언제 또 이런 곳에 와서 강아지들과 산책하는 경험을 해 보겠어? 고양이 두 마리의 집사로서 강아지와의 산책 경험은 아주 귀한 것이니 놓칠 수는 없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마당으로 나가니 사장님과 강아지 두 마리가 벌써 산책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다. 밤에는 땅별이 펼쳐져 있던 들판을 따라 넓게 한 바퀴를 돌면서 씰룩거리는 강아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경험은 정말 피곤함도 싹 가시게 만들었다. 이름을 부르면 어찌나 찰떡같이 자기를 부르는 것을 아는지 고개를 홱 돌리는 모습도 사랑스러웠다. 이래서 강아지와 함께하는 건가? 괜스레 반려동물과 산책하는 삶이 부러워졌다. 우리집 냥이들도 나와 함께 예쁜 풍경을 바라보며 산책하면 좋을 텐데, 그런 아쉬움을 매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의 적당히 서늘하고 쾌적한 공기를 마시며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악양에 정착하게 된 계기와 소소한 일상 속 이야기들, 거쳐 온 인생의 크고 작은 조각들을 듣는 것이 즐거웠다. 낯선 곳에서 새롭게 만난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는 생각 외로 어색하지 않고 나에게 힐링을 주었다. 그 어떠한 부담도 없이 편하게 대화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수줍게 퇴사 고백도 하면서 사장님과 조금 더 친밀해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넉살이 좋은 사람이었나? 글쎄,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오랜만에 타지에서 가벼이 나누는 대화가 마냥 즐거웠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옵션이 있었다. 사장님께서 손수 만들어 주시는 조식. 산책을 마친 후 사장님께서는 바로 조식을 준비해 주시고, 직접 식탁 앞으로 초대해 주셨다.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사장님의 손길을 거친 정성스럽고 아기자기한 식탁 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또 한 번 감동이었다. 누군가 이렇게 나를 위해 정성스레 아침을 차려 주다니. 작은 감격의 연속이 바로 하동 여행이 아니었나 싶다. 직접 밤마다 만드신다는 식빵과 수제 바질페스토, 딸기잼. 손수 깎아 주신 과일과 달걀 후라이. 그중 압권은 감자였다. 감자가 뭐 별거인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평소 감자의 텁텁한 식감 때문에 고구마를 더 선호하던 나로서는 식탁 위의 감자를 한 입 먹자마자 깜짝 놀랐다. 감자가 이렇게 맛있을 수도 있나? 소금간을 한 것도 아니고, 설탕을 뿌린 것도 아닌데 달짝지근하니 짭쪼름한 것도 같고 맛있었다. 사장님께서는 나의 이런 반응에 작게 웃으셨다. 시골처럼 좋은 환경에서 자란 감자는 맛도 다른 건가? 새삼 또 감격. 그렇게 또 사장님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맛있는 음식을 먹다 보니 어느덧 숙소를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마지막으로 갱얼쥐들의 머리를 북북 쓰다듬어 주었다. 배까지 쓰다듬어 달라고 벌러덩 눕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한 십 분은 더 복실복실한 털을 마음껏 만져 볼 수 있었다. 언젠가 또 한 번 방문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사장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숙소를 떠났다. 이제 어디 가지? 그것이 관건이었다. 사장님께서 차 없이 다른 곳으로 가기엔 너무 머니 화개에 있는 쌍계사를 구경하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을 해 주셔서 즉흥적으로 다음 행선지를 정했다. 어차피 화개행 마을 버스도 곧 도착 예정이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시간에 맞추어 마을버스가 도착했고, 나름 한 번 경험해 보았다고 능숙하게 동전 하나를 내고 버스에 올랐다. 안내원 분께 한소리를 들으며. 버스를 탈 때마다 누구보다 먼저 타겠다며 우글우글대는 사람들을 뚫고 항상 인도 위에서 내려와 버스를 기다리던 습관 그대로 도로 위에 서 있었던 나는 안전을 위해서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반성했다. 아, 여기서는 그렇게 조급해하지 않아도 되는데. 얼마나 쫓기면서 산 거야? 버스에 타니 산책하면서 잠시 잊고 있던 피곤함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멀미까지 겹쳐서 그런 걸까? 2시간도 못 잔 몸은 그저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외쳤다. 그래도, 이왕 온 김에 쌍계사 하나는 보고 가자. 그 생각에 30분 정도를 달려 쌍계사 입구 앞에 도착했다. 막상 버스에서 내려 바깥 공기를 마시니 컨디션이 조금 괜찮아지는 듯했다. 그런데 쌍계사로 가는 길이 왜 이렇게 언덕길인 것인지. 힘을 내어 올라가 볼까 생각해 보다가 결국 발걸음을 뒤로 돌렸다. 근처에 마침 커다란 녹차밭이 있었고, 그곳 정자에 앉아 한참을 녹색 풍경을 감상하며 바람을 쑀다. 그리고 이곳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차 박물관이 있었다. 하동에 온 김에 또 차 박물관은 놓칠 수 없지. 쌍계사는 쉽게 포기했으면서 박물관으로 향하는 내리막은 터벅터벅 발이 잘만 움직여졌다. 차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직접 체험해 보면 더 좋았겠지만 미리 예약하고 오지 않아 아쉬웠다. 대신 하동의 차에 관한 역사와 문화를 배우면서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차 명인들의 인터뷰도 보았는데, 한 평생을 한 가지에 몰두하여 최상의 것을 만들어 내기까지의 과정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가벼이 마시던 차 안에 누군가의 귀한 인생이 녹아들고, 인내의 시간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 감명 깊었다. 하동에서의 경험을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느끼고 싶어서 찻잎을 구매했다. 이번에는 세작 녹차로. 우전 녹차와 달리 세작 녹차는 4월 말 이후에 만들어진 녹차라고 한다. 이왕이면 다양하게 경험하면 좋으니까. 뿌듯한 마음으로 박물관을 나선 나는 바로 다음 행선지를 정했다. 화개터미널 근처에 다원은 아니지만 다도를 즐기기에 좋은 커다란 차 카페였다.
첫날 마셨던 대로 우전 녹차를 시켰다. 그런데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수제 녹차 젤라또도 함께 시켰다는 점이었다. 당이 너무 떨어졌기도 하고, 평소에 녹차맛이라면 무조건 YES이기 때문에 안 시킬 이유가 없었다. 밤새 나를 괴롭힌 카페인이었지만 그래도 하동에서의 마지막 날인데 차를 안 마시고 갈 수는 없었다. 녹차는 여전히 부드러운 맛으로 나를 감동시켰고, 젤라또는 지친 내 몸에 활기를 북돋아주었다. 정성어린 조식을 마음껏 먹은 뒤라 따로 점심은 챙겨 먹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마침 터미널도 바로 옆이고, 이제 슬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잠깐의 해프닝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것이 나비효과가 되어 나를 다시 쌍계사로 데려다 주었다.
반강제로 올라가게 된 쌍계사는 아름다웠다. 올라가는 길은 힘들었어도 확실히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다시 쌍계사로 돌아가게 되었냐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시간에 맞추어 터미널에 대기하고 있던 나는 마침 시외버스가 들어서기에 바로 다가가 기사님께 물었다. 어? 그러고 보니 첫날에 뵈었던 인상 좋은 그 기사 분이셨다. 반가운 마음으로 나는 물었다. OO으로 가는 버스 맞나요? 돌아오는 대답은, 맞기는 맞는데 쌍계사로 갔다가 대략 1시간 후에 다시 OO으로 되돌아 간다고 했다. 뭐지? 순간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떠올랐다. 시간표에는 분명히 여기서 바로 돌아가는 루트의 버스가 있다고 적혀 있었는데,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사님께서는 곤란해하는 나를 보시더니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쌍계사를 구경하고 다시 돌아가는 게 어떻냐고 제안하셨다. 뭐, 달리 선택지도 없는 것 같아서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10분 정도 지났을까? 나는 기사님과 함께 종점인 쌍계사에 도착했고, 내릴 때쯤 기사님이 넌지시 말씀해 주셨다. 아마 내가 기다리던 버스가 광양에서 출발해서 제시간에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꽃 축제 시즌이라 차가 좀 막혀서 늦었을 수도 있다고.... 이런.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시간 지체하지 않고 바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는데. 그래도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별 수 있나? 쌍계사와 나의 인연이 깊은가 보다 생각하면서 1시간 뒤에 다시 버스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어느덧 익숙해진 쌍계사 입구길을 따라 오르막을 올랐다. 우스운 일이었다. 몸은 피곤하지만 그래도 당을 충전한 덕분인지 몰라도 무사히 오르막을 오르고 쌍계사의 풍경을 감상했다. 아직 벚꽃이 피기도 전이었고, 석가탄신일도 다가오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하긴 특정한 시기에만 절을 찾는 것은 아니니까. 고즈넉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래도 제법 시간이 잘 갔다. 문제는 버스 시간에 맞추어 슬슬 내리막을 걸어 오는데 배가 고프다는 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오늘까지 연속으로 2만보를 걷는 셈이었는데, 잠은 두 시간도 못 잔 채로 강행군이었다. 입구를 따라 늘어선 포장마차 중에 내 눈을 사로잡은 녀석을 향해 바로 달려갔다. 풀빵. 따끈하게 익은 풀빵을 순식간에 세 개를 해치우자 그제서야 뱃속이 든든해지면서 살 것 같았다. 버스를 타기 전 생수 하나와 소시지도 사 먹었다.
하동을 여행하는 동안 힐링되는 순간도 많았고, 생각에 잠기는 순간도 있었고, 웃픈 에피스드도 있었지만 결국엔 모두 나에게 좋은 양분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참 좋은 순간들이었다. 언제 이렇게 여유를 가지고 녹색 풍경을 마음껏 감상하고, 좋은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을까? 언제 내가 또 이런 경험을 하게 될까? 만약 또 치열한 경쟁 속으로 뛰어들게 된다면 이런 경험과는 멀어지는 삶을 잠시 살게 될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 이 순간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사실 여행을 하면서 아쉬운 점이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 여행에 나도 모르게 되게 큰 기대감을 가졌었던 것 같다. 퇴사 후 잃어 버린 내 모습을 이 여행을 통해 찾고 싶었다. 굳이 혼자 여행하겠다고 결정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그래야 더욱 내 내면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오랜만에 완벽히 혼자가 되는 느낌이 두렵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시간 동안 내면에 더 적극적으로 침잠하고, 지난 날들을 돌이켜보고, 앞으로의 인생 방향이 뚜렷하게 정해지기를 기대했었다. 그런데 막상 여행을 하니까 그렇게 치열하게 내면과 싸우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크게 보았을 때에는 나에게 이로운 일이지만 그 과정이 결코 유쾌할 수만은 없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회피했나 보다. 그런 면에 있어서 아쉬움이 남지만 그것 빼고는 전부 다 즐겁고 아름답고 소중한 경험들이었다. 하동에 다시 방문할 의향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당연히 YES고, 그때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 혼자 여행을 하면 항상 느끼는 점이 바로 누군가와 함께 이 풍경을 바라보면 참 좋겠다, 하는 것이었다. 물론 고독함을 즐기는 것이 혼자 여행의 묘미이지만 말이다. 지금도 하동 여행 내내 들었던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녹찻잎의 향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서 미소가 지어진다. 오랜만에 참 여유롭고 한적하고 아름다운 시간들이었다. 언젠가 또 보자, 하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