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2장: 허무한 왕좌
1. 무너진 설계자들
모든 것이, 끝났다.
세상은, 차지원의 마지막 고백 이후, 거대한 혼돈과 냉소의 바다에 잠겼다.
하지만 시간은, 언제나 그랬듯, 모든 것을 무심하게, 낡은 신문지처럼, 과거의 페이지로 넘겨버렸다.
광화문 광장의 분노도, 캠퍼스를 뒤덮었던 광기도,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한 얼룩처럼, 번져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연극의 주인공들은, 각자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강원도의 한 작은 해안 마을.
시간이 멈춘 듯한, 낡은 어촌이었다.
짠 내 섞인 바닷바람이, 슬레이트 지붕 사이를, 휘파람처럼, 울며 지나갔다.
마을의 유일한 버스 정류장 옆, 허름한 구멍가게의 평상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싸구려 선글라스와, 챙이 넓은 모자로, 얼굴을 깊숙이 가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갓 나온 지역 신문이 들려 있었다.
신문 1면에는, [강태준 신임 당대표, 대국민 담화 발표]라는, 굵은 헤드라인이 박혀 있었다.
여자는, 그 헤드라인을, 아무런 표정 없이, 오랫동안,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손가락 끝, 짧게 깎인 손톱에는, 희미하게, 벗겨진 와인색 매니큐어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수연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강태준이 쳐놓은 완벽한 덫에 걸려, ‘희대의 사기꾼’으로 낙인찍힌 그날 이후.
그녀는, 검찰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감옥에 가지 않았다.
강태준은, 그녀가 자신의 마지막 비밀까지 폭로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그녀에게, 집행유예라는, 마지막 자비를 베풀었다.
그것은, 자비가 아니었다.
그것은, 영원한 족쇄였다.
그녀는, 이 나라를 떠날 수도, 자신의 이름으로 다시 살아갈 수도 없는, 유령이 되었다.
그녀는, 이곳으로 왔다.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의 가장 외진 구석으로.
그녀는,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뉴스를 보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세상을, 설계하려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한때 세상을 불태울 듯 타오르던 그 뜨거운 야망의 불꽃은, 이제, 차가운 잿더미가 되어, 꺼져 있었다.
그녀는, 가끔, 밤마다, 꿈을 꾸었다.
자신이, 올림포스 산 정상, 그 펜트하우스에서, 강태준과 함께, 도시를 내려다보는 꿈.
하지만 꿈속의 그는, 언제나,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이 만든, 완벽하고 차가운 도시 모형만을,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이수연은, 신문을, 조용히, 접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방파제 위를,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등 뒤로, 늙은 갈매기 한 마리가, 무심한 울음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한때, 불을 훔쳤던 프로메테우스는, 그렇게,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진, 회색빛 바닷가에서, 자신의 형벌을, 홀로, 살아가고 있었다.
같은 시각, 서울.
여의도, 더 마크 타워, 60층 펜트하우스.
강태준은, 자신의 왕좌에 앉아 있었다.
그는, 마침내,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
이수연을 희생양으로 삼아, 모든 혼돈을 잠재운 그는, ‘위기의 해결사’이자 ‘새로운 보수의 희망’으로, 화려하게 떠올랐다.
그의 정적이던 ‘원로 그룹’은, ‘미래 설계자들’ 스캔들의 여파로, 모두, 정치적 생명이 끝났다.
그는, 마침내, 당대표가 되었다.
권력의 가장 높은 곳으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의 설계대로였다.
그의 앞에는, 거대한 스크린이, 여러 개로 분할되어, 대한민국 전체를,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주식 시장의 동향.
주요 언론사의 헤드라인.
그리고, 소셜 미디어의 여론 데이터.
그는,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새로운 비서관이, 정중한 자세로 서서, 다음 일정을 보고하고 있었다.
이수연이 앉았던 그 자리였다.
하지만 강태준은, 더 이상, 그 누구와도, 자신의 계획을, 공유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얻었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새로운 대한민국을 설계하려는, 그 뜨거운 야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오직, 자신이 이룬 것을, 지키려는, 차가운 의심과, 피로감만이, 서려 있었다.
그는, 매일 밤, 잠을 설쳤다.
그는, 정체불명의 세력이, 차지원의 방송을, 어떻게 중단시켰는지를, 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모르는, 자신보다 더 거대한 힘이, 이 판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이, 그를, 편집증적인 불안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펜트하우스를, 외부와는 완벽하게 차단된, 최첨단 요새로, 바꾸어 버렸다.
그는, 왕이 되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왕국 안에, 스스로를, 가둔, 죄수가, 된 것이다.
그는, 손짓으로, 비서관을 물렸다.
방 안에는, 다시, 그 혼자만이, 남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대한 건축 모형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꿈꾸던, 완벽한 도시.
하지만 그는, 이제, 그 도시를, 이전처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도시 모형의 가장 높은 첨탑 위에, 아주 작게, 쌓여 있는, 먼지를, 발견했다.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자신의 실크 손수건을 꺼내, 그 먼지를, 병적으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질서는, 완벽해야만 했다.
아주 작은, 흠결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의 왕국은, 그렇게, 살아있는 생명력이 아니라, 먼지 한 톨 없는, 박제된 풍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무너진 설계자.
그는, 자신의 꿈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2. 훔쳐진 이야기, 훔쳐진 왕좌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차지원의 서재 창밖으로, 가을의 마지막 잎들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창가에 서서, 텅 빈 거리를,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상의 소음은, 잦아들었다.
그녀의 이름을 연호하던 광신도들도, 그녀를 저주하던 악플러들도, 이제는 새로운 자극을 찾아, 다른 곳으로 흩어졌다.
그녀는, 잊혀졌다.
그것은, 그녀가 원했던 것이었지만, 그 평온함은, 폐허의 고요함과도 같았다.
그녀의 소설, 『그림자 연극』은, 이제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책이 되었다.
그녀의 마지막 라이브 방송 이후, 원고는 인터넷을 통해 빛의 속도로 퍼져나갔다.
정식 출판되지 않은 그 텍스트는, 수십 개의 다른 버전으로, 복제되고, 변이하고, 재해석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그녀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 모든 음모론자들의, 새로운 성경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문장 속에서, 자신들이 믿고 싶은 비밀 코드를 찾아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의 이름은, 현실 정치인의 이니셜으로 해석되었고, 소설 속 가상의 사건들은, 실제 역사의 빈틈을 메우는, 완벽한 증거로, 둔갑했다.
그녀는, 문학을 썼다.
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예언서로, 혹은 고발장으로, 읽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그녀에게서, 완벽하게, 훔쳐졌다.
이수연은, 이야기의 육체를 훔쳤다.
하지만 세상은, 이야기의 영혼을, 훔쳐 가버린 것이다.
며칠 전, 한 원로 문학평론가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이 모든 사태에 대해, 지식인 사회를 대표하여, 그녀에게 사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소설을,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정치 알레고리’라며, 극찬했다.
차지원은,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들은, 아직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알레고리 따위를, 쓴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썼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서재를,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은, 더 이상, 그녀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노트북을 열고, 하얀 워드 파일을, 몇 시간이고,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의 상상력은, 죽었다.
자신이 낳은 자식이, 끔찍한 괴물이 되어, 세상을 파괴하는 것을, 목격한 어미에게, 다시 새로운 아이를 낳을 힘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거실로 나왔다.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김민준은, 그날 이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강태준 측이 약속했던 대로, 유명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의 그림은, ‘비극적 시대의 아픔을, 아내를 통해, 예술로 승화시킨, 위대한 예술가’라는, 포장지와 함께,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그는, 마침내, 평생 동안 원했던, 성공을, 손에 넣었다.
자신의 영혼과, 아내의 삶을, 팔아넘긴, 대가였다.
차지원은, 더 이상,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무심하게, TV를 켰다.
뉴스에서는, 강태준 신임 당대표의, 기자회견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그는, 승리했다.
그는, 이수연이라는 완벽한 희생양을 통해, 모든 혼돈을 잠재우고, ‘정의를 바로 세운 지도자’라는, 새로운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는, 화면 속에서, ‘국민 통합’과, ‘정의로운 사회’를, 역설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모든 단어들이, 차지원의 귀에는, 텅 빈 깡통 소리처럼, 공허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생각했다.
‘훔쳐진 왕좌’.
강태준은, 마침내, 왕좌에 올랐다.
하지만 그가 앉은 그 왕좌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이수연이 시작하고, 차지원이 완성시킨 이 거대한 연극의, 진짜 결과는, 승리나 패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뢰’의, 완벽한 파괴였다.
사람들은, 이제,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언론도, 정치도, 법도, 심지어, 진실 그 자체마저도.
모든 것이, 누군가에 의해, 설계되고, 조작된, 서사일 뿐이라고, 그들은 믿게 되었다.
강태준은, 왕이 되었지만, 그의 백성들은, 모두, 자신만의 왕국 안에 갇힌 채, 서로를 의심하는, 냉소적인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그는, 아무도 믿지 않는, 텅 빈 왕국의, 고독한 왕이었다.
왕좌는, 도둑맞았다.
강태준이, 그의 정적들에게서, 훔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훔쳐진 것이었다.
차지원은, TV를 껐다.
그녀는, 다시, 서재로 돌아왔다.
그리고, 하얀 워드 파일이 띄워진, 노트북 앞에, 앉았다.
화면 속에서, 검은 커서가, 텅 빈 공간 위에서, 심장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훔쳐진 이야기.
훔쳐진 왕좌.
그리고, 이야기를 잃어버린, 작가.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키보드 위로, 가져갔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글자도, 쓸 수 없었다.
그녀의 왕국 역시,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파괴해버렸기 때문이다.
3. 무엇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
시간이, 흘렀다.
거대했던 폭풍은,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지나갔다.
광화문 광장의 핏자국은, 계절이 바뀐 아스팔트 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인터넷을 뒤덮었던 광기의 언어들도, 새로운 자극, 새로운 스캔들 아래로, 서서히 묻혀갔다.
도시는, 다시, 평온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치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깊은 내상을 입은 자의, 체념과 무기력이 만들어낸, 창백한 평온이었다.
대한민국은, 깊고 서늘한,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아무것도,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불신의 안개.
그해 겨울, 지하철 2호선.
열차 안의 풍경은, 일 년 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화면 속에는, 더 이상, 정치 뉴스의 굵은 헤드라인이나, 시사 유튜버의 열변이, 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손가락은, 고양이 동영상과, 아이돌의 댄스 챌린지와, 끝없이 올라오는 상품 광고들 사이를, 무심하게, 기계적으로, 스크롤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거대한 이야기로부터, 스스로를, 추방했다.
그들은, 한번 속았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모든 이야기가, 결국에는, 자신을 속이려는, 또 다른 종류의 거짓말일 것이라고, 미리, 단정해버렸다.
그들은, 믿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의미 없는, 자극들로, 채워 넣고 있었다.
정론일보 편집국.
한때, 대한민국 전체의 의제를 설정한다고 자부했던 그곳은, 이제, 유령 도시처럼, 휑했다.
이수연의 스캔들 이후, 신문의 판매 부수는, 반 토막이 났다.
온라인 기사의 댓글 창은, ‘기레기’, ‘조작의 달인’이라는, 조롱과 혐오의 언어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날 오후, 한 젊은 기자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오세훈 부장의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현직 장관의 비리가 담긴, 명백한 증거 자료가, 들려 있었다.
이것은,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진짜, 특종이었다.
“부장님!
이거, 터뜨려야 합니다!
이것만 터지면, 우리가 잃었던 신뢰를…”
하지만 오 부장은, 그 자료를, 건네받지도 않았다.
그는, 지친 얼굴로, 젊은 기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한때 그를 불태웠던, 야망의 불꽃 대신, 차가운 재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이걸 터뜨리면, 세상이, 뭐라고 할 것 같은가.
‘정론일보의, 또 다른 조작’이라고 하겠지.
아니면, ‘저 장관이, 강태준 대표의, 새로운 정적이 된 모양이군’이라고, 비웃겠지.
아무도, 이걸, 진실이라고, 믿어주지 않아.”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냥, 덮어.
그리고, 저기, 어제 터진, 톱스타 커플 이혼 기사나, 더 키워.
적어도, 그건,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즐겨주기라도 하니까.”
한때, 세상의 감시자를 자처했던 똥개는, 이제, 자신의 이빨이, 모두 빠져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한 참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짖을 힘도, 의지도, 없었다.
국회.
본회의장.
야당의 한 젊은 의원이, 연단에 서서, 강태준 대표가 이끄는 정부의 새로운 부동산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었다.
그의 분석은, 논리적이었고, 그의 증거는, 명백했다.
하지만 그의 연설을, 진지하게 듣는 의원은, 거의 없었다.
인터넷 생중계의 채팅창은, 냉소적인 조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또 시작이네.
저것도, 누가 써준 각본이냐?]
[그래서, 이번엔, 무슨 설계자들이 등장하는데?]
[정치인들끼리, 싸우는 거, 이제 지겹다.]
강태준은, 자신의 의원석에 앉아, 그 모든 풍경을, 만족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결과였다.
그는, 정적들의 목소리를, 제거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비판’이라는 언어 자체를, ‘음모론’과 동의어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그 어떤 정당한 의혹 제기도, 대중의 귀에는, ‘미래 설계자들’ 놀이의, 또 다른 버전으로, 들릴 뿐이었다.
그의 왕국에서는, 더 이상, 그를 위협할, 진지한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냉소적인, 침묵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LA의 반지하 스튜디오.
빅터는, 여전히, 방송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방송 내용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미래 설계자들’을, 외치지 않았다.
그 거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복잡하고, 지저분하게, 끝나버렸다.
이제, 그의 새로운 컨셉은, ‘모든 것을, 의심하라’였다.
그는, 주류 언론의 뉴스와, 정부의 발표를, 똑같은 무게로, 조롱했다.
그는, 진보와, 보수를, 똑같이, 비웃었다.
그의 방송에는, 더 이상, 선과 악의, 구분이 없었다.
오직, ‘너희가 보는 모든 것은, 거짓말이다’라는, 단 하나의, 허무주의적인 메시지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진실은, 없습니다.
진실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놈들이, 바로, 사기꾼입니다.
믿을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입니다.”
그의 방송은, 이전보다, 더 큰,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은, 그의 그 냉소적인 태도에서, 기이한, 해방감을, 느꼈다.
아무것도 믿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편리함.
빅터는, 더 이상, 음모론의, 전도사가 아니었다.
그는, 불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위한, 가장 완벽한, 교주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혼돈이 시작되었던, 대학.
한 철학과의 강의실.
차지원을 대신하여, 새로운 시간 강사가, ‘미디어 비판 이론’을, 강의하고 있었다.
그는, ‘미래 설계자들’ 사태를, 교재 삼아, 진실과 거짓의 문제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강의실 뒤편에 앉아 있던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강사는,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지목했다.
“네, 학생, 좋은 질문입니까?”
학생은, 순진한, 그러나 모든 것을 꿰뚫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교수님., 그런데요...
교수님이 지금 하시는 그 말씀이, 진실이라는 것을, 저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죠?”
“교수님의 그 ‘진실’ 역시, 저희를 설득하기 위한, 또 다른 종류의, ‘설계된 이야기’는, 아닐까요?”
강사는,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학생의 질문은, 논리적이었다.
그리고, 치명적이었다.
그들이 파괴한 것은, 단 하나의,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들은, ‘진실’이라는, 개념 그 자체를, 파괴해버린 것이다.
이성과, 논리와, 토론의 공간이었던 대학은, 이제, 그 어떤 권위도, 설 자리를 잃어버린, 회의주의의 놀이터가, 되어 있었다.
왕좌는, 텅 비어 있었다.
진실의 왕좌가, 무너져 내린 자리에.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작은 왕좌에 앉아, 스스로가, 왕이 되었다.
오직, 자신의 믿음만을, 진실이라 여기는.
서로를, 영원히, 의심하는.
수천만 개의, 고립된, 왕국.
그것이, 이 길고 잔인했던 연극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유산이었다.
4. 허무, 그 이후
겨울이, 찾아왔다.
세상을 뒤덮었던 그 뜨거운 광기는, 마치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대신, 모든 것의 온도를, 감정을, 그리고 의미를, 얼려버리는, 길고 긴 겨울이 시작되었다.
차지원은, 자신의 집, 그 고요한 성채 안에서, 세 번째 계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세상의 뉴스를 보지 않았다.
세상은, 그녀를 잊었고, 그녀 역시, 세상을 잊으려 애썼다.
강태준이, 마침내, 여당의 가장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가 되었다는 소식도.
이수연이,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소식도.
빅터가, 이제는 ‘미래 설계자들’이 아니라, ‘외계인 정부’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팔고 있다는 소식도.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다른 행성에서 벌어지는, 낯선 소음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그녀의 하루는, 단순했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창가에 앉아, 해가 뜨는 것을, 본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해가 지는 것을, 본다.
그녀의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쌓이고 있었다.
마치,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리고, 울지도 않았다.
그녀의 내면은, 모든 것이 휩쓸고 지나간 뒤의, 텅 빈 폐허와도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졌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승리도, 패배도, 이제 그녀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단어일 뿐이었다.
그녀는, 그저, 살아남았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겨울 오후였다.
우편함에, 낡은 편지 한 통이, 꽂혀 있었다.
디지털 시대에, 손으로 쓴, 낯선 편지.
발신인의 이름은, 없었다.
오직, 강원도의 한 작은 해안 마을의, 소인만이, 찍혀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거실의 낡은 소파에 앉아, 편지 봉투를, 뜯었다.
안에서는, 정갈하지만, 어딘가 힘이 없는, 글씨체로 쓰인, 편지지 몇 장이, 나왔다.
그녀는,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이 편지를 보낸 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차지원 작가에게.
왜 이 편지를 쓰는지는, 나 자신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죄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나는, 내 행동을, 후회하지 않으니까.
이것은, 아마도, 한 명의 건축가가, 다른 한 명의 건축가에게 보내는, 마지막 설계 보고서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수연이었다.
당신의 소설, 『그림자 연극』은, 내가 평생 동안 보아왔던, 그 어떤 텍스트보다, 완벽한 설계도였습니다.
당신은, 인간의 불안과, 욕망이, 어떻게 서사라는 이름의 집을 짓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더군요.
나는, 당신의 그 완벽한 설계도를, 훔쳤습니다.
그리고, 현실이라는 대지 위에, 그 집을, 직접, 지어보려 했습니다.
나의 실패는, 설계도의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나의 실패는, 자재의 본질을, 얕보았던, 시공사의, 실패였습니다.
나는, 대중이라는 자재가, 내가 원하는 모양대로,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진흙이 아니라, 화약이었습니다.
나는, 강태준이라는 자재가, 나와 같은 야망을 공유하는, 단단한 강철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비추는, 차가운 거울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당신이라는 자재를, 그저 부서지기 쉬운, 유리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내 모든 계산을 뛰어넘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였습니다.
결국, 우리가 지으려 했던 그 거대한 건물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모두는, 그 잔해 속에, 묻혀 있지요.
나는, 이곳, 세상의 끝에서, 매일, 바다를 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썼던, 그 보이지 않는 질서. 나는 그것을, 내 손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우리 둘 다,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실패는, 우리가, 그 질서를 만들기에, 부족한 건축가였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애초에, 그런 질서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일까요.
아마, 당신이라면, 이 질문의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 모르겠군요.
편지는, 그렇게, 끝나 있었다.
어떠한 서명도, 없이.
차지원은, 편지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어떠한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다.
분노도, 연민도.
그녀는, 이수연이, 자신과,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만든 이야기의, 완벽함을, 숭배했던, 오만한 창조주.
다만, 자신은, 그 이야기를, 종이 위에만 남겨두었고.
그녀는, 그것을, 현실에, 구현하려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파멸이었다.
차지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이수연의 편지를 들고, 벽난로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불꽃 속에, 그 편지를, 던져 넣었다.
종이가,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이수연의, 그 정갈했던 문장들이, 검은 재로 변하며,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차지원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이수연의 편지만을, 태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소설, 『그림자 연극』을, 태우고 있었다.
그녀는, 이수연이 만들었던, ‘미래 설계자들’이라는 괴물을, 태우고 있었다.
그녀는, 이 지독했던 이야기, 그 자체를, 자신의 기억 속에서, 불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재만이, 남았다.
그 순간, 차지원은, 아주 오랜만에, 처음으로,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녀는, 더 이상, 이 이야기의, 창조주도, 피해자도,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그녀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그녀는, 서재로, 돌아왔다.
그리고, 몇 달 동안, 굳게, 닫아두었던, 창문의 커튼을, 활짝, 열었다.
차가운 겨울의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먼지들이, 그 빛 속에서, 춤을 추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리고, 하얀 워드 파일을, 열었다.
화면 속에서, 검은 커서가, 텅 빈 공간 위에서, 심장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달랐다.
이전의 침묵이, 절망의 침묵이었다면.
지금의 침묵은, 가능성의, 침묵이었다.
그녀는, 이 폐허 위에서,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될까.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아주 작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어쩌면, 용서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조화를 꿈꾸는, 어리석은 이상주의자의, 이야기일지도.
그녀는, 그저,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볼 뿐이었다.
허무.
그리고, 그 이후.
텅 빈 왕좌 앞의, 빈 페이지 위에서.
그녀의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