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필로그: 다시, 빈 페이지 앞에서
1. 그리고, 계절이 바뀐 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모든 것이 끝난 뒤의 봄이었다.
광화문 광장의 핏자국을 덮었던 흰 눈은 녹아내렸고, 대학 캠퍼스의 깨진 유리 조각들은 모두 치워졌다.
세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자신만의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분명히, 죽었다.
우리는, 그것을 안다.
이것은, 승자와 패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수연은, 자신이 훔친 불에 스스로의 날개가 타버린 이카루스처럼, 세상의 기억 속에서 추락했다.
강태준은, 마침내 원하던 왕좌를 손에 쥐었지만, 아무도 없는 텅 빈 극장에서 홀로 독백을 외치는, 고독한 왕이 되었다.
그리고 차지원은, 자신의 진실이, 어떻게 가장 끔찍한 괴물을 키워내는 자양분이 되었는지를 목격한 뒤, 깊은 침묵 속에 잠겼다.
모두가, 이 잔인한 연극의, 패배자였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는 것일까.
이수연이 창조했던 ‘미래 설계자들’이라는 괴물은, 강태준이라는 또 다른 괴물에 의해 파괴되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허구의 괴물이 지른 비명이, 잠자고 있던 진짜 괴물을 깨웠다는 섬뜩한 진실만이, 폐허 위에 남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진짜 괴물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서늘한 여운만이.
우리는, 질문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그 ‘진짜 괴물’은, 과연 누구인가.
차지원의 방송을 멈추게 했던, 그 정체불명의 힘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이수연이 상상했던, 혹은 빅터가 떠들어댔던, 그런 종류의 존재가 아니다.
그들의 힘의 본질을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진짜 구조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돈이나 정치 권력으로 움직이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 세계의 시스템 그 자체에, 보이지 않는 뿌리를 내리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힘은, 음모가 아니라, 질서 그 자체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전력망을, 우리가 숨 쉬듯 접속하는 통신망을, 마치 자신의 신경계처럼, 조율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가 ‘상식’이라고 부르는 것,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것의, 보이지 않는 경계를 설정한다.
그들은, 강태준처럼, 왕좌에 오르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왕들이 서 있는 무대 그 자체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지원의 방송 중단은, 그들이 보낸, 작지만 명백한 메시지였다.
‘너희들의 유치한 연극이, 우리가 설정한 무대의 경계를, 침범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이야기와, 현실에 대한, 슬픈 기록이다.
한 명의 작가는, 현실을 비추는, 허구의 이야기를 썼다.
한 명의 기자는, 그 허구의 이야기를 훔쳐, 현실을 조작하려 했다.
한 명의 정치가는, 그 조작된 현실을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진짜 현실은, 마치 신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난 뒤, 우리는, 다시, 빈 페이지 앞에 서 있다.
계절은 바뀌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문장 위를,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음 페이지에, 어떤 새로운 이야기가, 쓰이게 될지를, 두려움과 함께,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 다시 처음으로 : 재와 그림자
1. 진짜 시작
분노는, 사라졌다.
불안도, 없었다.
남은 것은, 지독한 피로감과,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는, 명료한 결심뿐이었다.
더 이상, 싸울 의미가 없었다.
적의 얼굴도, 전쟁의 명분도, 모두 잃어버렸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무대에서, 스스로, 퇴장하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한때는, 국가의 그림자였던 자가,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스르륵-' 하고, 잘 닦인 나무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서랍 안은, 그의 성격처럼,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는, 가장 깊숙한 곳에, 손을 넣었다.
익숙하고, 묵직한 감촉의 물건을, 꺼내 들었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몽블랑 만년필이었다.
평생을, 올곧은 공직자로 살았던, 분이었다.
아버지는, 이 펜으로, 후배들의 임명장에, 서명했다.
아들은, 이 펜으로, 국가의 운명을 가를지도 모를, 비밀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인생에, 마침표를, 찍으려, 하고 있었다.
그는, 만년필의 뚜껑을 열어, 잉크 잔량을, 확인했다.
거의, 비어 있었다.
그는, 옆에 놓인, 네모난 잉크병을, 들었다.
짙고 푸른, ‘로열 블루’ 색상의, 잉크였다.
그는, 펜촉을, 병 안에 담그고, 천천히, 잉크를, 빨아올렸다.
투명한 관 안으로, 푸른 액체가, 차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생명을 주입하는 듯한, 경건한 행위였다.
잉크를 다 채운 그는, 부드러운 헝겊으로, 펜촉에 묻은 여분의 잉크를,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그는, 유서를, 쓰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은, 가족에게 남기는, 사적인 편지가, 아니었다.
변명도, 폭로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평생을, 정보의 미로 속에서, 살아왔다.
그는, 마지막 순간만큼은, 수수께끼나, 암호 뒤에, 숨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목격한, 이 거대한 비극의, 진실을, 단 한 조각이라도, 남겨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가, 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임무였다.
그는, 두툼한 크림색 메모지 묶음에서, 맨 위, 한 장을, 떼어냈다.
종이의 질감이, 손끝에,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그는, 메모지를, 책상 정중앙, 가죽 데스크패드 위에, 반듯하게, 올려놓았다.
그리고, 만년필을, 굳게, 쥐었다.
그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실패와, 절망과, 그리고 마지막 남은, 희미한 경고를, 이 작은 종이 위에, 새겨 넣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종이를 긁는, 펜촉의 소리만이, 서재의 침묵을, 채웠다.
그것은, 그가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보고서였다.
나는 실패했다.
하지만 나의 실패는 괴물을 쫓다 나 자신이 괴물이 되었다는 따위의 낭만적인 독백이 아니다.
화성(華城)의 망령.
모든 것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내가 평생을 바쳐 충성했던 보수의 원로들, 그들의 부와 권력은 애국이 아닌 매국(賣國)의 역사 위에 서 있었다. 일제 시대에 나라를 팔아 얻어낸 드넓은 땅들. 그들은 해방 이후에도 교묘한 권모술수로 그 자산을 지켜냈고,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다시 나라의 땅을 집어삼켜 자신들의 제국을 건설했다. 그들은 그 피 묻은 돈으로 언론을 사고, 검찰을 길들이며, 나 같은 충직한 공무원들을 ‘똥개’처럼 부려, 그들의 권력을 유지해왔다.
나는 그들의 충실한 개였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가장 추악한 비밀을 알아버린 개를, 더 이상 살려둘 생각이 없다.
그들의 손이, 지금, 내 목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강태준.
그 굶주린 늑대는, 늙은 사자들의 시대가 끝났음을 직감했다. 그는 원로들의 모든 비밀을 손에 쥔 채, 그들을 하나씩 사냥하여 새로운 왕이 되려 한다. 그리고 그 마지막 사냥감은, 바로 나다.
이 메모가 세상에 나올 때쯤, 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의 손에 죽느니, 스스로 이 연극의 막을 내린다.
이것은 나의 유서이자, 마지막 보고서다.
부디, 신이시여, 이 썩어버린 나라를…
그는, 글쓰기를, 멈췄다.
그는, 펜촉 끝에, 마지막 남은 잉크 한 방울을, 자신의 이름 서명 아래, 마침표처럼, 찍었다.
그리고, 만년필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책상 위에는 이제, 한때는 국가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았던 한 남자의, 절망적인 고백이, 푸른 잉크의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암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해서, 오히려, 더 위험한, 진실의 파편이었다.
그는, 자신이 남긴, 이 작은 종잇조각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것은, 내일 아침, 누군가의 손에, 발견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정의를 위한,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더 거대한 악을 위한, 가장 완벽한 무기가, 될 터였다.
이제, 그의 역할은, 끝났다.
그는, 이 위험한 시한폭탄을, 무대 위에, 완벽하게, 설치했다.
윤석호는 몸을 돌려, 책상의 가장 아래쪽 서랍으로 손을 뻗었다.
다른 서랍들과는 달리, 그곳에는 작은 열쇠 구멍이 있었다.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익숙하게 잠금장치를 풀었다.
서랍이 소리 없이 열렸다.
안에는 벨벳 천으로 감싸인 물건이 하나 들어 있었다.
그것은 잘 마른 삼베로 꼰, 굵고 단단한 밧줄이었다.
오래전, 한 작전에서 증거물로 수거했던 물건이었다.
누군가의 삶을 끝냈던 바로 그 밧줄.
그는 그것을 파기하지 않고, 기이한 전리품처럼 간직해왔다.
마치 언젠가 자신의 차례가 올 것을 예감이라도 했던 것처럼.
그는 밧줄을 꺼내 들었다.
손바닥에 감기는 삼베의 감촉이 거칠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서재의 가장 높은 곳을 올려다보았다.
천장 중앙에는 무거운 샹들리에를 걸기 위해, 설계 단계부터 보강된 장식용 고리가 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그 고리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오늘을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묵직한 마호가니 의자를 끌어다 고리 아래에 놓았다.
의자 위로 올라서자, 자신이 평생을 바쳐 만든 지성의 요새가 한눈에 들어왔다.
수천 권의 책들, 가지런히 정리된 서류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마지막 메시지.
완벽한 무대였다.
그의 손은 전문가의 손이었다.
떨림 없이, 기계적인 순서에 따라 움직였다.
그는 밧줄의 한쪽 끝을 천장의 고리에 단단히 묶었다.
매듭은 간결하면서도 절대 풀리지 않을 모양새였다.
그리고 남은 밧줄의 끝으로, 자신의 목에 꼭 맞을 올가미를 만들었다.
그의 손놀림은 마치 중요한 행사를 위해 넥타이를 매는 신사처럼, 기묘할 정도로 침착하고 우아했다.
그는 의자 위에 선 채, 목에 올가미를 걸었다.
거친 삼베의 감촉이 목을 쓸었다.
그는 아내를 생각했다.
아들도 생각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이제는 쉴 시간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발밑에 놓인 의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저것만 치우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는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의자를 걷어찼다.
의자가 마룻바닥에 나뒹구는 요란한 소음.
밧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내는, 비명 같은 마찰음.
그리고 잠시 동안,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는 희미한 소리.
이윽고 서재에는 완전한 침묵이 찾아왔다.
방금 전의 소음들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천장의 고리에 매달린 그의 몸이, 아주 천천히, 시계추처럼 좌우로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의 그림자가 책상 위를 오갔다.
마치 그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고 있는 것처럼.
창밖의 도시는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2. 박형사의 등장과 거래
서재 안은, 죽음의 냄새와, 과학수사대 요원들이 뿌린 루미놀 시약의, 화학적인 냄새가 뒤섞여, 기이한 정적을 이루고 있었다.
박형사는, 그 모든 혼돈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의 닳아빠진 가죽 점퍼 위로, 감식반의 푸른색 조명이, 유령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눈은, 슬픔이나, 연민을, 담고 있지 않았다.
그의 눈은, 그저, 이 지긋지긋하고 복잡한 사건을, 가장 빠르고, 가장 간단하게, 종결짓고 싶은, 베테랑의 권태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외부 침입 흔적, 없어.”
한 젊은 형사가, 그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현장 상황으로 보아, 명백한, 자살입니다.”
“그래.”
박형사가, 짧게 대답했다.
“유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박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요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현장을, 천천히, 가로질렀다.
그의 시선이, 이 비극의 제단, 윤석호의 책상 위로, 향했다.
모든 것이, 질서정연했다.
마치,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처럼.
그의 눈이, 책상 정중앙에 놓인, 크림색 메모지 한 장에, 멎었다.
그는, 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는, 그 안에, 이 모든 사건을 종결시킬, 간단한 유서가 적혀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눈이, 그 위에 적힌, 짙고 푸른 잉크의 글자들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
그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화성(華城)의 망령.
보수의 원로.
강태준.
그의 머릿속에서, 지난 이십 년간, 경찰 생활을 하며, 어둠 속에서 주워들었던, 위험한 이름들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것은, 유서가 아니었다.
이것은, 폭탄이었다.
대한민국 전체를, 아니, 이 나라의 가장 깊은 곳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 있는.
그의 심장이, 아주 잠시, 세차게, 뛰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의감이나, 사명감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평생에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한, 거대한 기회를 마주한, 도박사의, 탐욕스러운 심장 박동이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요원들은, 다른 증거물들을 수집하느라, 분주했다.
아무도, 그를,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이 작은 종잇조각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움직였다.
그것은, 수천 번의 현장에서 단련된, 빠르고, 정확한 움직임이었다.
그는, 윤석호의 유언장을, 반으로, 다시 반으로, 접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거물 봉투가 아닌, 자신의 낡은 가죽 점퍼, 가장 깊숙한 안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아무도, 보지 못했다.
진실은, 그렇게, 너무나 쉽고, 허무하게, 은폐되었다.
그는, 서재를 나섰다.
그리고, 아파트의 고요한 복도 끝,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낡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는, 그의 손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그는, 차가운 콘크리트 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다른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그의 공식적인 업무용 전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둠 속의 거래를 위한, 그의 진짜 전화기였다.
그는, 주소록에서, 단 하나의 이름을, 찾아냈다.
그가, 지난 몇 년간, 몇 번의 시시한 정보들을 팔아넘기며, 관계를 유지해 온, 가장 야심 있고, 가장 돈 많고, 그리고 가장 무자비한, 사냥꾼의 이름.
[이수연 기자]
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울렸다.
그리고, 잠이 덜 깬, 그러나 언제나처럼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이수연입니다.”
박형사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의 목소리는, 값을 매기는, 상인처럼, 낮고, 건조했다.
“박 반장입니다.”
그가 말했다.
“지금, 트리니티 캐슬.
4701호.
윤석호, 죽었습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수연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훨씬 더, 명료해져서, 돌아왔다.
“그래서요.”
박형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언제나, 본론을 원했다.
“그가, 남겼습니다.”
박형사가, 말을 이었다.
“유서.
아주, 재미있는, 유서를.”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마지막 미끼를, 던졌다.
“이건… 좀, 비쌀 겁니다.”
전화기 너머의 침묵은, 이번에는, 조금 더, 길었다.
그것은, 거대한 상어가, 먹잇감의 냄새를 맡고, 그 가치를, 계산하는, 그런 종류의 침묵이었다.
마침내, 이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제, 잠기운 따위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 그리로 가겠습니다.”
전화는, 끊겼다.
박형사는, 마지막 남은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다.
그는, 자신의 안주머니에 잠들어 있는, 그 작은 종잇조각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는, 자신이 방금, 얼마짜리 거래를, 시작했는지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자신의 통장에 찍힐, 몇 억의 돈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방금, 한 나라의 운명을, 팔아넘겼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알았지만, 상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비상계단을 나와, 다시, 사건 현장으로, 돌아갔다.
그의 얼굴에는, 다시, 지치고 권태로운, 평범한 형사의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그는, 젊은 형사에게, 다가가, 말했다.
“유서는, 없는 걸로, 종결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박형사는, 비상계단을, 내려갔다.
그의 발걸음 소리는, 어둠 속으로, 희미하게, 사라졌다.
그의 주머니 속에서는, 한 남자의 진실이, 헐값에 팔려나갈, 상품이 되어,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도시의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 진실을 살, 새로운 설계자가,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비극은, 언제나, 그렇게, 가장 은밀한 곳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결국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계는, 누군가의 가장 정교한 거짓말 위에 세워진, 하나의 거대한 무대일 뿐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