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를 향한 마음, 서비스의 경쟁력이다
그 편의점에 귀신이 붙은 건 아니었다. 난데없이 무슨 귀신이냐고? 아마 누가 들으면 그 편의점에 나를 홀리는 귀신이 붙어, 마트보다 비싼 것을 뻔히 알면서도 편의점으로 향하는 줄 착각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편의점에는 귀신이 없다. 잘생긴 아르바이트생도 없다. 대신에 무지 친절하고 정 많은 사장님 한분이 계신다.
배가 고팠지만, 입으로 뭔가를 씹어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때는 녹차 아이스크림 만한 것이 없다. 나는 퇴근길 내내 아이스크림을 생각하다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편의점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러다가 잠시 마트로 가서 살까 생각했다. 대략 천오백 원 정도는 편의점이 비쌀 것 같다는 계산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내 원래대로 편의점으로 갔다. 편의점 사장님 얼굴이 생각나서였다. 사실 집 근처에는 규모가 꽤 큰 마트가 두 개나 있다. 가격도 싸고 적립도 차곡차곡 되어, 이사온지 얼마 안 되어선 그 마트들을 이용했다. 그런데 편의점의 존재를 알게 된 후로는 마트에 자주 가지 않는다. 장보기 물품의 대부분은 대기업의 '쯔윽 배송' 같은 것을 이용하기 때문에 주로 자잘하게 당장 필요한 것만을 마트 혹은 편의점에서 산다. 마트는 편의점보다 거리도 멀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편의점 사장님처럼 나를 알아봐 준다거나 나한테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없다. 그래도 마트로 갔어야 했다고? 천오백 원이 차이 나니까? 겨우 그런 이유로 편의점에 간 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물론 금액으로만 계산하면 그렇다. 하지만 그날 나는 편의점으로 갔다.
사장님은 기억도 못하시겠지만, 처음에 사장님을 뵐 때부터 마음에 빚이 있었다. 한 밤중에 살 것이 있었고 마트는 문을 닫았고 편의점에 찾아가 계산을 하려는데 스마트폰 케이스 뒷면에 넣어놓았던 신용카드가 없는 것이다. 그때의 난감함이란, 지금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휴대폰에는 무슨무슨 페이 같은 것이 깔려있었고 생전가야 쓸 일이 없다 판단했던 그런 것들로 결제를 시도해봤지만 편의점 시스템과 호환되지 않는지 내가 못하는 것인지 결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자 사장님이 슬며시 웃으면서 "뭘 걱정하세요. 저한테 계좌로 보내시고 물건 가져가시면 되지요."라고 하셨다. 와! 정말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나는 사장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그 후로 종종 편의점에 들렀다. 주로 택배를 보낼 것이 있을 때 편의점을 찾았는데 제법 얼굴이 눈에 익어서인지 나를 늘 기억해주시고 "날이 쌀쌀하다"라고 정감 어린 인사를 자주 해주셨다.
코로나가 터지고서는 본가에 몇 번 마스크를 보냈다. 그리고 6월이 되어 첫 책을 출간하고는 책을 사인해서 보내야 할 일들이 많아졌다. "또 마스크예요?"라고 저번에 내가 마스크 보냈던 것을 기억하는 사장님께 "아니요. 책이에요"라고 반복해서 말하게 되자 사장님은 "책을 자꾸 어디로 보내는 거예요?"라고 했고 나는 "제가 책을 출간했는데 나중에 한 권 드릴게요."하고 수줍게 말했다. 그 후에 약속을 지켰고 비 오는 어느 날 또 방문하게 되었는데, 사장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책 잘 읽고 있어요. 오늘같이 비 오는 날에 읽기 참 좋아요" 그것도 진솔된 표정으로 웃으면서. '비 오는 날'이 어울린다고 표현하신 것을 보니 사장님이 책을 진짜 읽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빚졌던 마음을 조금 갚았단 생각이 들면서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진정한 접객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불현듯 '장사의 신'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에어컨이 시원한 건 당연한 일이지만 엄마가 부쳐주는 “부채 바람”에서는 시원함 뿐만 아니라 행복을 함께 느끼잖아. 상대를 향한 마음, 그게 있다는 게 가장 큰 경쟁력이라고. (우노다카시, '장사의 신' 중에서)
그러고 보니 내가 처음 이 동네로 이사를 왔을 때만 해도 사장님은 옆 단지 안쪽 자리에서 작은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대로변에 예전 편의점의 세배에 가까운 크기의 편의점을 운영 중이다. 예전 작았던 편의점을 얼마 동안 운영했는지 모르겠으나 비교적 젊은 나이에 단기간 사업을 확장한 것을 보면 그는 진짜 숨겨진 접객의 신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사장님이 친절해서 편의점에 갈 때마다 뭐 하나라도 더 살 것이 없나 둘러보게 된다. 아마 나 같은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과거 동생과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동네에 구멍가게가 있었다. 동생은 그 구멍가게 사장님을 좋아했다. 그 사장님은 말투가 굉장히 느릿하고 목소리 톤이 낮았는데 동생은 집에 오면 사장님 성대모사를 곧 잘했다. 동생은 집에 오는 길에 군것질 거리를 사고 싶다면 동선이 꼬이더라도 꼭 그 가게에서만 사 왔다. 나도 그 가게를 좋아하긴 했지만 꼭 그곳만 이용하진 않았다. 구멍가게에선 팔지 않는 물건들이 많다. 어느 날 동생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왜 꼭 네모(가명) 슈퍼에서만 사는 거야?"하고. 동생의 이유는 단순했다. "아저씨가 나 항상 기억하고 친절해서, 팔아줘야 돼."
엊그제인 금요일 출근하면서 작은 택배를 보내려고 편의점에 들렀는데 내가 포대자루 같은 큰 야상을 입은 것을 본 사장님께서 "추위 많이 타시나 보다. 감기 조심하셔야겠다." 하고 따스한 말을 건넨다. 그게 아무것 아닌 것 같은데도, 얇게 저민 든든한 감자떡같이 내 마음에 들어와서 쌓인다. 상대를 편안하게 해 주어 마음이 기울어지게 되는 따뜻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정말, 사람들이 귀신같이 달라붙는다. 떡 사이에 꿀을 발라 놓은 것처럼 쫀득쫀득 마구 달라붙게 된다. 마트보다 비싼 편의점으로 자꾸 향하게 되는 것은, 그러니까 철저하게 내 마음이다. 예전 내 동생의 그 마음처럼 가고 싶으니까, 사고 싶으니까, 팔아주고 싶으니까. 천오백 원 이상 비싸더라도 사람의 정과 따뜻함을 느끼고 싶으니까. 두껍고 큰 야상을 걸치는 것으로도 회복하지 못했던 온기가 그 날 편의점 방문 후 이 글을 쓰면서 조금은 훈훈하게 회복된다.
*** 이 글은 에세이 베스트셀러 ‘너의 사회생활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 에 수록된 초고입니다.
*** '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 불면증 오디오클립 '책 읽다가 스르륵'을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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