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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     


내가 좋아하는 가수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를 들을 때마다 우리 딸 세 살 때 일이 떠오른다.

어느 날 아이는 열이 났다. 콧물도, 기침도 없는데 이상했다. 열이 오를 때마다 부지런히 해열제를 먹였다. 나아지는 듯하더니 온도계는 비웃듯 39도를 다시 찍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저녁에만 열이 올랐다는 거다. 우리 부부는 맞벌이를 했다. 연차를 써야 하는 상황이 올까 봐 서로가 조마조마했다. 아침에 해열제를 챙겨서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겼다. 부모의 상황 때문에 아픈 아이를 돌보지 못한다는 건 워킹맘인 나에겐 마음이 짓이기는 일이었다. 이러면서 일을 다녀야 하는 건가 싶어 며칠은 눈물을 훔치며 출근을 했다.     



이틀이 지나도 열은 잡히지 않았다. 토요일이었다. 나는 출근을 했지만 신랑은 주 5일 제라 쉬었다. 그날은 한결 가볍게 직장을 향할 수 있었다. “카톡! 카톡!” 일하는 중에 기다리던 메시지가 울린다. ‘인후염이래. 약 받았어. 새벽녘에 고열로 시달리면 하던 대로 해열제 먹이며 상태 보고, 열이 잡히지 않으면 큰 병원에 가라고 하네?!’ 마음이 내려앉았다. 큰 병원까지 가야 한다니... 나는 걱정하고 있었다. 평일에 반차 쓰는 게 벌써부터 눈치가 보였다. 염치없게도 아이보다 내 상황을 먼저 걱정하다니.     



퇴근 후 해열제를 먹이며 상태를 계속 체크했다. 열과 사투를 벌일 밤을 의미심장하게 기다렸다. 월요일 새벽까지 열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른 아이는 신음소리를 내며 잠을 잔다. 중간중간 흐느끼기며 울기도 한다. 그때마다 나는 세연이를 어르고 안아주고 쓰다듬어주었다. 시간은 새벽 4시. 계산해보니 5일 동안 열이 잡히지 않고 있다.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신랑은 눈을 맞추었다. 아이를 차에 태웠다. 처음 와보는 응급실은 낯설고 어색했다. 여기저기 듬성듬성 떨어져 있는 침대. 그 위에 누워 있는 환자와 옆을 지키는 보호자, 휠체어에 앉아 어딘가를 향하는 사람, 원무과 앞에서 큰소리를 내는 아저씨, 발이 쉴 틈 없이 움직이는 병원 관계자들. 그 공간에 우리 가족도 있었다.     



간호사가 왔다. 열을 재며 말한다. “피검사하고 링거 라인을 잡을 거예요. 소아 응급실로 안내할게요.” 곧 길고 두껍고 날카로운 바늘이 토실토실한 아이의 살을 향한다. 혈관을 찾기 어려운지 간호사는 몇 번이고 세연이의 팔을 더듬는다. 나와 신랑은 각각 아이의 상체와 다리를 잡고 있다. 울고불고 목청이 터져라 울어대는 아이를 보니 숨이 멎는다. 첫 번째 실패. 두 번째도 실패. 손을 바꿀 수 있는 인원이 없어서 본인이 해내야 한다고 말하는 간호사의 눈과 손은 파르르 떨렸다. 비장하게 입술을 깨문 간호사는 라인을 잡는데 집중한다. 다행히 세 번째는 성공. 숨이 넘어갈 듯 울던 아이를 안아주었지만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한참을 토닥거렸다. 이어서 엑스레이도 찍고, 소변검사도 했다.     



여아의 소변검사는 잡히지 않는 빗방울 같았다. 아기의 성기 주위에 소변 검사 용기 입구를 동그랗게 붙인다. 3M 테이프인지 뭔진 모르겠지만 접착력이 약했다. 아이가 움직일 때마다 테이프는 떼지고 소변은 샜다. 우리는 세연이가 움직이지 않도록 주의를 주어야 했고, 아이는 시무룩하다 짜증을 냈다.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건 아이에게 물을 수시로 먹이는 일이었다. 거의 한 시간이 지날 무렵에야 가까스로 소변이 용기에 담겼다. 약간 새긴 했지만 소량이라도 검사할 정도는 된다고 했다. 세연이에게 고생했다고 잘했다고 포근히 안아주었다. 그때까지 우린 알지 못했다. 이 힘겨움은 입원 서막에 불과하다는 걸.     



컨디션이 나아진 아이는 그제야 소아 응급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뽀로로 인형도 보고, 벽에 붙여진 페티, 루피도 보았다. 인사도 하고 노래도 부른다. 그러는 중에 검사 결과가 나왔다. 의사는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염증 수치가 굉장히 높게 나왔다고 했고, 입원을 하며 경과를 봐야 할 거 같다고 했다. 새벽 6시였다.     



우리는 입을 모아 알겠다고 했고 입원 수속은 진행되었다. 입원을 하면 당연히 내가 옆에 있어야 했다. 아이를 더 잘 다루고, 아이가 더 찾는 사람은 엄마니까. 신랑은 내가 연차를 쓰지 못할 경우 본인이 어떻게든 직장에 부탁해 보겠다고 했다. 든든했다. 날이 밝아오자마자 직장 상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번호 누르는 손이 몇 번이고 멈칫거린다. 연결음이 들린다. 심장이 터질 듯 고동친다. “아이가 입원을 하게 돼서 3일 정도 연차를 써야 할거 같은데 괜찮을까요?” 상사의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입이 바짝 말랐다. 예상과 달리 퇴원할 때까지 옆에서 간호 잘 하라며 격려까지 해주신다. 수화기에 대고 고맙다고 연거푸 말했다.     



그날부터 아이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손에 링거줄이 있으니 불편한지 찡찡거렸고, 놀거리도 없으니 심심해했다. 문제는 밤이었다. 2인실이었지만 늦게 자는 아이 소리에 옆 친구가 잠들지 못했다. 나와 신랑은 아이를 휠체어에 앉히고 새벽 내내 병원 1층을 돌아다녔다. 몇 바퀴나 돌았을까 아이는 잠든다. 세연이를 병실 침대에 눕히면 신랑은 고생하라고 안아주며 출근을 위해 집으로 갔다. 나는 아이 옆에 쪼그려 누웠다. 보호자석은 있었지만, 아이가 잠결에 수액줄을 짓누르거나 당기진 않는지, 엉키진 않는지 살펴야 했고, 아이가 기척을 보일 때마다 일어나 수시로 확인해야 했으며, 엄마를 찾으면 토닥거려주어야 했다.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본다. 수액 때문인지 얼굴이 퉁퉁 부어 있다. 아이는 정말 아프구나. 진짜 현실이구나. 마음이 아프다.      



아침이 되면 똑같은 일상은 반복되었다. 병원생활에 적응한 아이는 링거를 해서도 여기저기 뛰어다녔고, 나는 뽈대를 잡고 뛰지 말라고 소리치며 아이 뒤를 열심히 쫓아다녔다. 링거 줄이 잘못될까 봐. 라인을 다시 잡아야 할까 봐. 걱정으로 마음은 쫄아들었다. 그러나 우려했던 일은 터졌다. 라인을 다시 잡아야 한다는 간호사의 말에 마음이 무너진다. 소아과 병동 간호사실 뒤편에 주사실이 있었다. 아이에게는 간호사 언니들 일하는 곳 구경 갈 거라고 바람을 넣는다. 그러나 세연이는 눈치를 채곤 안 할 거라고 싫다고 울고불고 난리다. 다행히 고참 간호사가 와서 라인을 한 번에 잡아 주었다. 달려가 뼈가 문들어지게 안아주며 뽀뽀를 퍼붓고 싶었다.



병원 생활은 정말 힘들었다. 아기 수발들기가 이렇게나 힘들 줄이야. 무엇보다 삼일 동안 샤워를 못하니 죽을 맛이었다. 아이도 나도 머리가 반질반질해졌다. 그땐 따신 물로 샤워하면 소원이 없겠다고 수도 없이 생각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왔다. 경과를 보기 위해 피검사하는 날! 거대한 빙하 위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뻣뻣하게 경직된 나는 빨리 집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기다리던 말이 내 귀속에 들어왔다. 염증 수치가 많이 내려갔으니 퇴원해도 된다는 말. 먼 여행을 마무리하고 고향을 향하는 사람처럼 나는 들떠있었다. 부리나케 우리 물건들을 챙겼다.      



나는 집에 오자마자 소원을 이뤘다. 역시 집이 최고라고 흥얼거리며 물을 튼다. 김이 모락모락 난다. 그동안의 피곤도, 노고도, 힘겨움도 다 씻겨 내려가는 듯 시원했다. 이제야 살 것 같다. 이어서 아이에게 말한다. “세연아 목욕하자!” 세연이는 그동안 못 놀았으니 놀다가 씻겠다고 했다. 자유로워진 아이의 두 손은 그동안 놀지 못한 만큼 한없이 움직였다.


순간 입원했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링거가 불편하다며 땡깡이 심했던 첫날.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둘째 날. 눈앞에 보이는 건 모두 만지려고 병동 복도에서 고집부리던 마지막 셋째 날. 옆 친구 울음소리에 깨고, 우리 애 소리에 옆 친구가 깨서 아이를 휠체어에 앉히고 새벽 내내 병원 1층을 몇 바퀴나 돌았던가. 낯선 위태로움에 불안해하던 우리 가족의 여러 날들. 그래도 무사히 치료 잘 받고 이겨내 준 우리 딸 세연이에게 고마웠다.      


자이언티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 가사 안에는 모든 게 다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아프지 말아야 한다는 것. 나도, 신랑도, 어머니도, 아이들도, 나의 부모님도 그거 하나면 족하다. 무얼 더 바랄까.

가족 중 아픈 이가 있다면 일상은 무너진다. 그 날 이후로는 다른 건 필요 없고 햇살처럼 모두가 건강하길 두 손 모아 기도한다.           



불과 3일 동안 입원했던 나와 아이를 생각하다가, 그보다 더 힘든 시기를 겪는 부모와 아이들이 떠올랐다.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얼마나 슬플지, 가늠할 수도 없는 아픈 시간 속에 그들. 차마 입이 떼어지지 않는다. 괜찮아질 거예요. 힘내세요.라는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으리라. 끝을 알 수 없는 시간의 벽에 갇혀 있는 그들의 슬픔은 설명도 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넓고 멀 것이다. 애석하게도 난 우리 가족에게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일어나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들 앞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낯 뜨겁고 겸연쩍고 송구스럽다. 죄스런 안도감이 부끄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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