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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슬 Mar 18. 2018

02.후유증

갑자기 그 순간들이 그리워졌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몇 시간째 지난 여행 사진을 뒤적거리고 있다. 들썩거리는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아, 이 그리움은 어쩌면 여행을 떠났던 2012년 8월 16일부터 쌓이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언제든 느끼도록 옆에 자리했지만, 길 위에 있을 때에는 항상 닿는 새로운 경험을 즐기느라 그 덩어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한켠에 쌓아만 두었던 건 아닐까. 계속 쌓이다 집에 돌아올 즈음 그것들이 어느덧 탑이 되어 있었던 거다. 계속 치워놓듯 쌓아 견고하지 않고 부실했던 '추억탑'. 돌아온 일상에서 그게 다시 보였고, 이따금 흔들거리다 오늘 내 앞에 와르르 무너져버린 거다.

유지와 장난치며 걷던 바기오 세션 로드. 네바다에서 같이 춤췄던 운용이와 민택이. 그리고 민택이의 LJ. 호준이 형과 뛰어다니면서 놀았던 라스베이거스, 가슴속까지 시렸던 보고타와 살사 배웠던 칼리, 바뇨스부터 리마까지 장염으로 고생한 35시간 버스여행. 재우와 승열, 민정, 희정이와 이스터섬에서 즐겼던 식도락 여행, 수크레에서 즐긴 찬란한 백수짓과 1초 시간 가는 게 아쉬웠던 우유니 소금사막. 입에 단내 났던 파타고니아 등반. 아이폰 잃어버린 영진이 어떻게 달래줄까 고민하던 오후. 그곳에서 린다비스타 사장님과 가진 홈파티. 그 집 딸내미가 수염 별로라고 해서 숙소에 돌아와 샤워하면서 바로 밀어버렸지. 타로상과 춤췄던 리오 삼바 축제. 곰이 되어 지냈던 크루즈 대서양 횡단, 지혜와 아이들을 만났던 베네치아부터 로마까지 이탈리아 중부 여행. 100년 뒤에 가더라도 똑같은 모습을 할 팔라조 아드리아노. 35유로 방값이 비싸지 않냐고 걱정스레 물어봤던 리조트 아주머니. 그곳에서 먹었던 푸짐한 이탈리아 가정식 아침. 몰타에서 만났던 수많은 인연들과 환락 천국 파처빌. 장랩장님과 런던에서 먹었던 인생 첫 피시 앤 칩스. 파리 1구 샤틀레에 머물렀던 플랫 소박한 내 방 침대와 나무 책상. 1주일 동안 매일 찾아갔던 에펠탑. 거기서 사람들과 기울이던 샴페인. 별이 쏟아지던 시와 사막. 온갖 사기로 날 힘들게 했던 카이로. 흐린 하늘에 실망했던 알렉산드리아. 하지만 그전에 판타날에서 멋진 하늘을 봤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았지. 재우와 조우한 다합. 길에서 우리 꼬셨던 은총이. 베들레헴에서 경험한 성경. 국경 버스라고 해서 탔더니 정말 국경 앞에 내려놓고 가버린 ‘알렌비’ 이스라엘-요르단 국경. 그곳에서 총 든 군인과 택시비 협상하던 뜨거운 사막 오후. 바레인에서 보낸 우연한 하루. 아껴왔던 나이키 신발 버렸던 뭄바이. 손톱에 때가 까맣게 찼던 귀여운 영국 배낭여행자. 델리에서 만난 병주. 그가 여행한다고 배낭에 담아왔던 소주 몇 병. 판공초에서 고산증으로 고생했던 주미 때문에 약이랑 병원 구하러 동분서주하던 날. 승열이와 다시 만났던 조드푸르, 똥을 밟았는지 기준이 모호해지고 관대 해지는 바라나시. 바라나시, 삶의 날 것이 보이는 곳. 머리끝까지 몸을 담갔던 갠지스 강. 돌아 걷는 나를 불러 세우며 뛰어와 이름 모를 과일을 건네며 웃어주었던 인도-네팔 이미그레이션 오피스 직원. 왜 걷는지 나도 몰랐던 혼자 등반, 안나푸르나. 비행기 놓치고 카트만두로 돌아오던 택시에서 허탈한 모습. 유지를 다시 만난 싱가포르. 잊지 못할 코팡안 풀문파티. 방콕 지니네 1층에서 뒹굴던 멜론과 기선. 같이 터벅이며 걸어가 먹었던 주차장 스테이크. 혼자 잠깐 다녀오겠다고 가던 캄보디아 길에 국제 체크카드를 안 가져와서 국제미아 될 뻔한 순간. 호찌민에서 1년 만에 어색하게 만난 사랑에 빠진 무파. 푸동 공항에서 집에 가는 비행기 앞에 두고 불안해서 공항에 주저앉아 메신저 하던 모습.

395일. 9,500시간. 57만 초. 여행의 한 순간도 잊을 수 없다. 미치겠다.

여행의 경험이 큰 재산이 될 거라고 자신했던 나였다. 남은 건 그리움이다. 뽀얀 추억이 아닌 피멍 같은 기억이 되어버렸다. 아프다. 예쁘게 반짝이던 추억들이 반짝이는 유리조각이 되어 마음에 박힌다. 이렇게 되어버릴걸 알았더라도, 그래도 배낭을 메었을까. 다시 추억이 있던 그곳에 간다면 지금 내 앞에 쏟아진 그리움을 이겨낼 수 있을까. 그런 여행을 다시 하는 것이 두렵다. 좋은 사람을 만날까봐, 따뜻한 추억을 만들까봐. 나는 지금 그리움에 지고 있다. 여행을 후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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