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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비아 Oct 31. 2020

혼자 있기 좋은 방

아홉개의 방, 아홉개의 여행 : 시베리아 횡단열차

모스크바, 12월31일, 오후 1시 50분, 영하 8도.

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탔다. 드라마틱한 날짜는 일부러 고집한 건 아니었다. 늦장을 부린 탓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시베리아'라는 말에 겁을 집어 먹었다. 신발을 사러 가도, 파카를 고르는 중에도 "이만하면 괜찮아." 라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어떤 것도 시베리아 겨울 앞에서는 움츠러 들었다. 게다가, 나는 장기여행자이므로, "털 함량이 200그램 들어간 새 부츠를 주세요." 라고 말할 만큼 부자도 아니었다. 모스크바에서 중고 옷가게를 보름동안 뒤졌다. 내 크기보다 10밀리미터 큰 털부츠와 빨간색 스키용 파카를 샀다.


네개의 침대와 네개의 미등, 한 개의 천장등, 이층 침대 사이에 놓인 테이블, 미닫이 문, 벽 한면을 채운 창문.

9번 열차, 이등석 객실, 이층 침대 30번, 달리는 내 방이었다. 하루에 세 번 멈춘다. 오전 11시, 오후 3시, 새벽2시. 이층에 올랐다. 매트리스 위에 비닐에 포장된 침대보, 베갯잎, 겨울모포가 놓여 있었다. 물, 빵, 버터, 아보카도, 홍차, 토마토, 햄,치즈, 사발면, 샐러드. 5일 동안 먹을 식량가방을 꺼냈다.


미닫이 문을 밀고, 복도 반대편끝까지 걸었다.  머리 위, 벽에는 도시이름과 시간, 온도가 디지털숫자로 반짝였다. 바로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을 받을 수 있는 온수기, 과자, 커피믹스가 진열되어 있다. 직원은 맞은편 작은칸에 앉아 있었다.


 휴대폰, 노트북도 고장난지 오래였다.

'네 번의 밤을 무얼하며 보낼까?'

'영화, 음악, 말을 걸 사람도 없는 한 해의 마지막 밤이라니.'

불편하고 좁고 어색한 밤이 지나갔다.

다음 날, 그릇을 꺼내 오트밀을 담았다. 반대편 복도 끝까지 걸었다. 온수기를 눌러, 뜨거운 물을 부었다.아침을 먹으며, 창밖을 보았다. 자작나무와 눈.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을 한명도 보지 못한 새해 첫날이라니. 밖에서 인기척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제복을 입고 모자를 쓴 직원이 얼굴을 내밀었다.

"스노우빔 고우담." 남자가 말했다.

' 그래, 저거였구나. 어젯 밤에 벽사이로 여러 번 울린 전화벨 소리와 매번 똑같았던 대답. '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또박또박 소리를 만들려고 했지만, 서툴렀다.

" 스.노.우.빔.  ...  ...."

"Happy New Year."

이틀동안 처음 나눈 대화였다. 밤새 이웃이 했던 말을 귀로 훔쳤다. 다행이다. 눈을 보며 직접 말해 준 사람이 한명 있어서 말이다. 새해 첫날 인사말은 어디든 비슷하다. 입술모양과 혀의 위치만 다를 뿐이다. '온전한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 하루에 몇 마디를 해야 할까? 꼭 걸어야 하는 걸음수는? '  일일 입술움직임권장량. 일일다리사용권장량에 대해 생각했다.

이틀동안, 기차는 여러명의 손님이 타고 내렸지만, 내 칸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계속 혼자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벌써 저녁이었고, 이등석 화장실 옆옆칸을 급하게 예약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사각형칸이 확장되었다. 기차바퀴와 철로가 한개씩 맞물릴때 마다 지난 7년의 밤과 시간이 펼쳐졌다. 나는 동쪽에서 출발해서, 서쪽으로 갔다. 이제는 반대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달려 집으로 가는 중이다. 비행기, 배, 기차 중 어는 것을 타고 갈지 고민했다. 비행기는 24시간안에 나를 서울로 데려다 줄 것이었다. 나는 비행기의 속도가 두려웠다. 그것은 나의 리듬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기차의 속도를 선택했다. 땅을 밟아야 진짜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몸은 하루만에 서울에 가는데, 7년의 삶에 익숙한 영혼은 무스캣, 트빌리시, 이스파한, 시비우, 트롬소, 로바니에미 어딘가에서 걷고 있을 것 같았다. 영혼은 걷는생각이다. 영혼이 사색할 수 있는 기차를 골랐다. 조지아에서 국경을 넘어, 러시아 블라디카프카스에서  모스크바까지 기차로 이틀밤을 달렸다.이제 이루크츠크, 울란바토르, 블라디보스토크까기 기차를 탄다. 마지막으로 배를 타도 동해로,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고향에 간다.

천장불을 끄고, 침대맡 등을 키면  어둠이 온다.  바깥풍경은 상대적으로 환하다. 나는 기차 전용칸에 숨어, 수천 그루의 자작나무를 마음에 심었다. 아까워서 잠들고 싶지 않았다. 시베리아 설원, 적막, 일몰. 여행자들은 내게 자주 말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거나 맛있는 것을 먹을 때, 감상을 나눌 수 없어서 혼자 여행하는게 별로라고. 나도 몇 번 그런식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건 게임 2단계만 해본 입에서 나온 말이다. 11단계쯤 가면, 짜릿하다. 나만 볼수 있는 것, 나만 느낄 수 있는 것. 그래서, 여행이 모두 내 것이다. 나의 오른쪽 뇌를 잘라서, 엄마, 애인의 머리에 심어도 이 기억은 호환되지 않는다. 설명할 수 없어서, 나눌 수 없어서 완전한 나의 소유가 된다. 아침커피, 주말 브런치, 비타민 알약대신 기억냉동실에서 꺼내 한 개씩 먹는다. 마신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만 알고 있는 비밀레시피, 비밀노래이다.

머리맡 베개에서 톨스토이가 쓴 안나카레리나를 조금씩 읽었다.  테이블 위에 파울료 코엘료의 순례자도 기다렸다. 뜨거운 물, 초콜렛 부스러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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