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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비아 Apr 20. 2020

아무개씨의 중독

1월 부터 12월이  공항 수하물 컨베이어벨트처럼 몇 바퀴 돌았을 때, 나는 향수병에 걸렸다. 보통은 두고 온 음식, 애인, 날씨, 방에 대한 기억때문에 여행자에게 흔하게 생기는 질병이다. 나는 문자가 말썽이었다. 몇 년동안 거의 읽지 못 했다. 간판, 책, 식당 메뉴, 버스 정류장. 주위는 매번 처음보는 글자였고, 나는 한 번도 예상해 본 적 없는 문맹이 되었다. 가게에서 샴푸와 린스를 구별 할 수 없고, 아무 맛도 첨가되지 않은 요거트를 먹을 권리도 없었다.


모국어를 잃어버린 여행자의 운명을 어떤 심정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어떤 여행안내서에도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동시에 미지의 세계가 열렸다. 암호를 해독하는데 집중했다. 그 때부터, 무엇이든 습관적으로 관찰했다. 치약 포장지, 기차표, 얼굴표정, 눈빛, 영수증.


어쨌든 단어나 몇 마디 필요한 입말은 즉석에서 배워 꽤 써먹었는데, 활자는 절망적이었다. 운이좋아 게스트하우스에서 여행자가 남긴 책을 줍기도 하고, 드물게 교환도 했다. 내가 이해할수 있는 문자의 종류는 제한적이어서, 이런 기회도 일년에 서너 번 뿐이었다. 더는 성에 차지 않았다. 닥치는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작가의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이  솟았다.


조지아에서 가장 큰 서점을 뒤졌지만, 헛물만 켰다. 해외배송도 궁리했지만, 애매한 위치에 있는작은 나라에는 직접 배송하지 않는다고 했다. 새로운 구역에 산책을 갔다가 극장을 발견했다. 입구 왼쪽에는 외투를 보관하는 중년여자가 머리를 끄덕이며 졸고 있었다. 중앙 홀을 구경하는데, 테이블 위에 장식품과 책 한권이 보였다.


이럴수가. 표지가 Ramond Carver 였다. 일주일 동안 찾고 있었던 작가의 이름이었다. ‘누가 영어소설책을 외곽의 소극장에 갖다 놓은 걸까?’ 나는 주위를 한 번 살피고, 슬쩍 책을 가방에 넣었다. 태연하게 극장을 빠져 나오자 마자, 한참을 뛰었다. 심장박동이 너무 빨라 멈췄다. 달리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레이먼드 카버라서, 그것도 아니라면 도둑질때문이었을까? 읽고 싶은 욕망때문에 숨이 차고, 현기증이 났다.

며칠 후, 친구를 따라 시골 할머니네 집에 갔다. 흰색 숏커트, 왕방울만한 눈, 깊은 주름,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가진 엘레나가 나를 포옹했다. 식탁에는 막 구운 빵, 야채, 삶은 달걀, 고기요리가차려져 있었다. 우리 셋은 화이트 와인으로 건배를 했다. 엘레나는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이틀 밤을 자고, 친구는 논문 마무리를 위해 먼저 도시로 갔다. 우리 둘만 남았다.


내가 제일 기다리는 건 점심시간이었다. 얼굴만한 빵, 과일 피클, 화이트 와인 한 컵, 가끔씩 올라오는 치즈까지. 모두 그녀가 손수 만들었다. 나로 말하자면,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는 타입이었지만, 그 해 봄에 유독 자주 마셨다. 빵, 마른 입과  생활의 단조로움, 건조한 마음을 달래기에는 술만한게 없었다. 어디에 가도 가까이 있었다.


늦은 오후,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소설책을 집었다. 식탁은길가 차소리 때문에, 벽난로 옆은 텔레비전 때문에 시끄러웠다. 드라마는 할머니의 중요한 일과였다. 그 시간대에는 누구도 방해하면 안되었다. 딸에게 걸려온 전화도 급히 끊었다. 그리고 나서 화면 속 사람에게 심각하게 잔소리를 했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조용한 곳을 찾아, 이층 계단을 올랐다. 사별한 남편의 옷가지, 가구, 그리고 복도 제일 안쪽 구석에는 수십 개의 액자가 걸려 있었다. 사진 속 아기는 키가 자라더니 군복입은 모습에서 멈췄다. 나중에 친구에게 물었다. 조지아가 소련에 속하던 시절, 삼촌이  군대에서 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한 통의 사망 통지서가 배달되었고, 남자는 열 아홉이었다. 아들과 남편의 물건, 심지어 젊은 그녀의 옷도 그대로였다. 이층 기억의 방은 고장난 시계같았다.


어느 날, 젊은 부부가 왔다. 부활절을 앞두고 인사하러 온 것 같았다. 손님들과 엘레나를 따라 뒷마당으로 갔다. 뜰에 있던 고무타이어 중 한개를 그녀가 치우고, 비닐을 걷었다. 황토를 파내고, 뚜껑을 열었다. 붉은색 와인이 가득한 술독이었다. 빈 페트병에 와인을 담아 친척에게 들려 보냈다.

나는 그 사이에 엘레나처럼, 점심에 반주하는 습관이 붙었다. 그녀가 술을 깜빡하면 나는 “그비노”라고 당당하게 조지아말로 했다. 소설은 술술 읽혔다. 책 속 인물들은 일상에 균열이 생기고, 알코올로 시간을 죽였다. 이상할 만큼 책에 빠졌다. 세상에서  맨 처음 포도주를 담근 조지아 사람들, 소설 속 알코올 중독자, 나 자신. 모두가 동일한  인물같았다.

 

엘레나처럼 한 장소에 깊게 몸을 뿌린 내린 사람은 도망칠 수 없었다. 박제된 이층의 고통과 추억으로 부터 달아나려면 알코올과 드라마가 필요했다. 잊고 싶은 기억을 몽땅 흡수해줄 테니. 나처럼 변화를 좋아하는 여행자는 정착하는데 소질이 없다. 움직임은 나에게 에너지를 주었다. 조지아에서 네 개의 계절을 맞으니, 갇힌 기분이었다.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끊임없이 읽고, 떠나야  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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