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와 함께 하는 작가 자의식 생성기
"첫 소설을 쓸 때 느꼈던, 문장을 만드는 일의 '기분 좋음' '즐거움'은 지금도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습니다."
"아니, 그렇다기보다 내생각에는, 만일 즐겁지 않다면 애초에 소설을 쓰는 의미 따위는 없습니다."
"소설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퐁퐁 샘솟듯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57p)
처음 이 문장을 인터넷에서 보았을 때, 나는 놀랐다. 의미있는 일은 당연히 괴롭다, 이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키가 "만일 즐겁지 않다면 애초에 소설을 쓰는 의미 따위는 없습니다."라고 해버렸다.
3. 작가는 꼭 괴로운가?
소설을 왜 쓰는지, "누군가를 터치하기 위해. 나를 터치하기 위해. 흥분과 재미를 느끼기 위해.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라는 결론을 얻었다.
작가란 누구인지, "작가는 재능이 아니라 쓰고 싶은 마음과 쓸 인내력이 있으면 된다." 라는 결론에 도착했다.
그리고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다른 길에 막다른다. 작가는 꼭 괴로운가? 소설을 쓰는 작업은 원래 괴로운가? 다 이정도는 힘들게 쓰는 걸까?
웹소설 첫 투고를 준비할 때, '하루 일빡'을 위해 열심이었다. 하루 5천자를 쓰는 걸 말한다. 그리고 매일 연재가 기본이었다. 매일 5천자를 쓰고 연재한다. 그리고 느꼈다. 소설 쓰는 게 힘들다.
하루키는 말한다. "만일 즐겁지 않다면 애초에 소설을 쓰는 의미 따위는 없습니다." 이건 당시 내 머리를 날려버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하루키는 어떻게 즐겁게 소설을 쓸까?
1. 감사한다.
"내가 오랜 세월에 걸쳐 가장 소중히 여겨온 것은 (그리고 지금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나는 어떤 특별한 힘에 의해 소설을 쓸 기회를 부여받은 것이다'라는 솔직한 인식입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든 그 기회를 붙잡았고, 또한 적지 않은 행운의 덕도 있어서 이렇게 소설가가 됐습니다."
"어디까지나 결과적인 얘기지만, 나에게는 그런 '자격'이 누구에게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어진 것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58p)
유튜브에서 존스홉킨스 소아정신과 교수 지나영님이 이렇게 말했다. "I have to에서 I get to로 바꾸면 감사하게 된다.". 해야 한다에서 할 수 있게 되었다로 바꾸면 신난다.
개인적으로 글을 쓰는 일은 내게 의미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감사할 일이다. 인생에서 신나는 일이 있다는 것이니까. 글을 쓰면 난 흥분되고 재밌다. 글은 또 치유하는 능력이 있어서 내 상처까지도 소재가 된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치료를 하게 한다. 인물을 통해 몰랐던 사람을 알게 되고 하고 싶지만 아무도 듣지 않은 것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지나가는 사람은 모르지만 내 독자는 안다.
2. 쓰고 싶을 때만 쓴다.
하루키는 부지런한 걸로 유명하다. 새벽 4시인가 5시 하루키 루틴은 정말 널리 퍼져있다. (역시 일본의 문화는 그런 쪽으로도 퍼져 있구나, 싶었는데) 반전인 건 그가 쓰기 싫을 때는 안 쓴다는 것이다. 그때 그는 번역을 한다.
"실은 매우 단순한 이야기인데, 내 경우에는 소설을 쓰고 싶지 않을 때, 혹은 쓰고 싶은 마음이 퐁퐁 샘솟지 않을 때는 전혀 글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슬슬 그런 일을 해가면서 '소설 안 쓴다고 죽을 것도 아닌데, 뭘'하고 그냥 모르는 척 살아갑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111p)
정말 마음에 드는 문장이다. '소설 안 쓴다고 죽을 것도 아닌데, 뭘.' 하고 그냥 모르는 척 살아갑니다.
"그리고 어느 날, 참을 수 없어서(라는 게 아마도 가장 좋은 경우) 책상 앞에 앉아 새 소설을 시작합니다."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으니까 마감 날도 없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112p)
3. 결과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이건 하루키가 말한 적이 없다. 내가 만든 것이다.
조던 나이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 "에어"에서 나이키 회장으로 나온 배우가 이런 대사를 했다.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어. 조깅의 목적이 마라톤을 완주하는 거라고. 사실 조깅은 뛰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야."
(정확하지는 않다. 제대로 대사를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글쓰기는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다. 책을 쓰고 돈을 버는 게 목적이 아니다. 완결이 목적이 아니다. 날 증명할 필요도 없다. 나는 글로 증명되는 사람이 아니니까. 글쓰기는 글을 쓰는 그 행위로 가치있다.
날 이야기하고 지금 순간을 활자로 붙잡는다. 지금이 아닌 다른 순간을 글로 살아간다. 그리고 의미있는 것들을, 작은 흥분/재미부터 큰 메세지까지 원하는 대로 조명하고 창작한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내게 활력을 준다. 내 삶의 신나는 일이 된다.
4. 실수해도 된다.
한겨레에서 결제한 강의에서 작가님이 이렇게 말했다. "잘 다듬어진 글을 보면, 이게 그렇게 애써서 한 최선이구나 싶어서 신춘문예에서 제일 먼저 제한다."라고 했다. 그렇게 열심히 애써서 한 게 '이거'구나, 싶다고.
너의 최선은 '여기'구나 싶은 것이다.
오히려 정리가 잘 안 되어있어도 자신의 개성이 드러나면 가능성을 본다고 한다. 나는 맞춤법이 항상 위축되는 포인트다. 중학교 때 국어선생님한테 "글이 좋은데 맞춤법 때문에 깬다." 는 솔직한 평가를 받아서 더 그런 듯 하다. 펄펄 날아다니기보다는 열등감 때문에 "한국 학교에서 졸업한 것도 아닌데, 맞춤법도 틀리고 글의 기본이 안 되어있다."라는 생각에 위축될 때가 많다.
이번에 한겨레 강의를 들으며 이론도 듣다보니까 이것도 다 못하면서 "무슨 글을 쓰겠다고." 하는 생각이 무심코 들었다.
자. 이렇게 되면 글쓰기가 매우 괴로워진다. 하지만 이때 기억해야 한다.
"작가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라고 누가 말했더라. 아마 한겨레 강의 중 한 작가님이 말한 것 같다. 하루키가 말했었나?
아무튼 기억이 안 난다. 그러나 또 나 같은 고민을 하던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은 문학 공동체'의 누군가가 말한 말이다.
완벽함은 내가 추구할 바가 아닌 것이다. 나는 글을 써야 한다. 실수해도 된다. 그건 차차 나아질테니까.
결론적으로, 작가는 꼭 괴로운가?
- 지금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건 당연하지 않다고 인정하면 괴롭지 않다. 내가 글을 쓸 자격을 부여받았음에 감사하면 좋다. 또한 인생을 신나게 살 방법이 내게는 글쓰기인 것을, 또 이걸 찾았고 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에 날 칭찬해주면 좋다.
- 쓰고 싶을 때만 쓰면 괴롭지 않다.
- 결과를 만들지 않아도 되니 괴롭지 않다. 글은 완결이 목적이 아니라, 쓰는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다.
- 완벽한 글이 아니라, 실수 많은 나만의 창작품을 원하니 괴롭지 않다. 애초에 완벽은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