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소설을 쓴다
내 연인을 믿을 수 없다면 함께 있는 것 자체만으로 공포다. 특히나 선우에게는 그 공포가 더 심했다. 내 허리를 감싸던 남자친구의 손이 당장이라도 내 목을 조를 수 있다는 상상. 선우는 자주 그 상상을 한다. 애인이 바뀔 때마다 그 최악의 시나리오는 조금씩 달라졌다. 열 여섯 살 그 사건 이후 처음 만난 남자친구는 화날 때마다 손목을 아프게 꽉 잡았다. 움직일 수 없는 그 순간에 선우는 생각했다. 그 커다란 손에 내가 휘청거리며 끌려가는 모습. 반항하지 않는 선우. 그리고 끔찍한 밤. 그다음 남자 친구는 술에 취하면 어깨를 품에 넣을 듯 꽉 껴안았다. 선우는 그 품에서 벗어나려고 아등바등했지만, 할 수 없었다. 그 한계는 선우가 자신을 용서할 수 없게 했다.
형원이 머뭇거리다가 선우에게 말했다. 여자가 무섭다고. 자신이 8살 때 아동학대로 어머니가 잡혀가셨다고. 하지만, 현재는 어머니와 같이 산다고. 선우는 놀랐다. 형원은 겉보기에 멀쩡한 성인 남성이었으니.
선우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을 비웃었다.
‘겉보기에 멀쩡한 성인 남성.’
그러는 자신은 어떤가? 껍데기는 말끔한 성인 여성이라고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겠지. 그 안에 아직도 무력한 열여섯 살 여자아이가 앉아있는데도 말이다. 선우는 가끔 이렇게 편협한 자기 생각을 마주한다. 그럴 때면 자신도 가해자가 되는 듯이 스스로가 역겨웠다.
“어어.”
선우가 눈을 피했다. 형원은 왼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얼굴을 반쯤 가린 손이 덜덜 떨렸다. 형원은 사람의 체온은 따듯하다는 걸 알려준 애인이었다. 피부를 맞닿는 모든 행위가 덥고 찝찝하기만 했었다. 그러나, 형원만 예외적으로 다정하고 부드러운 체온과 피부라고 느껴졌다. 커다란 형원의 품 안에 안길 때 느껴지는 체온이 선우는 나름 즐거웠다.
“나 너무 힘들어.”
형원이 빨개진 얼굴로 흐느꼈다. 그의 목 옆에 새겨진 타투가 급한 호흡을 따라 위아래로 움직였다. 선우는 말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찾지 못했다. 형원은 더 빠르게 숨을 쉬었다. 양손으로 그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가렸다. 굵은 손 마디마디가 선우의 눈앞에 펼쳐졌다. 형원은 손안에 얼굴을 박았다. 선우는 그걸 보고 무언가를 떠올렸다. 정말 작아 보인다. 굴 안에 숨은 토끼 같다.
형원을 보고 하던 최악의 시나리오는 아직 없었다. 공격적인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그랬다. 하지만, 큰 키와 덩치 때문에 선우는 자신이 형원을 진심으로 방어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했다. 그 때문에 여전히 팔을 벌리고 그녀가 안기길 기다리는 형원 앞에서 약간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안기고 나면 형원은 변함없이 다정하고 따듯하기는 했다.
애를 써서 선우는 형원에게 자신을 투영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앞에 있는 형원이 열여섯 살 그때 자신 같아 보였다. 그래서 손끝도 건드릴 수 없었다. 닿았다가는 형원이 소스라치게 놀랄 것 같았다. 하지 않았으니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자꾸만 방안에서 혼자 엎드려 숨죽이고 울던 자신이 생각났다. 자신이라면 형원이 건드렸을 때 분명 온몸으로 거부할 것이었다. 왜냐면 형원은 자신에게 남자친구이기 전에 가해자의 형상이니까.
형원에게도 자신이 여자친구이기 전에 가해자의 형상일까?
“헤어질까?”
선우가 말했다. 형원이 얼굴을 번쩍 들었다.
“뭐?”
선우는 먼 산을 바라봤다. 다시 형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선우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헤어질 텐데. 형원은 놀라서 눈이 커져 있었다. 곧, 형원이 손등으로 눈을 벅벅 문질렀다. 선우는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형원에게 해주었다. 모든 주도권을 형원에게 툭 넘겼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할게.”
이게 맞는 걸까? 선우는 말을 하면서도 마음이 불안했다. 형원이 무조건 다정한 남자친구로 있을 거라는 법도 없는데 말이다.
형원은 조용히 선우의 품에 파고들었다. 선우는 뒷걸음질 쳤다. 형원의 눈물 젖은 속눈썹이 당황스럽게 위아래로 껌벅껌벅 움직였다. 선우는 이 순간에 드디어 형원과의 최악의 시나리오를 떠올렸다. 눈앞에 자동으로 펼쳐졌다. 마치 선우와는 상관없는 영화관 스크린처럼 말이다. 선우가 형원을 사랑했던 시간, 밤, 그리고 온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형원이 예상치 못하게 선우에게 다가오는 이 장면만으로 선우는 다시 열여섯 살 때로 끌려들어 갔다.
선우의 목구멍이 턱 막혔다. 무력감이 다시 선우의 신경을 눌렀다. 무감각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픔에도 공포에도 둔해지는 감각이었다. 소리 지를 수 없었다. 형원이 코앞에 왔을 때, 선우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선우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열여섯 살. 그 해는 선우에게 지워진 시간이다. 흔적은 몸 위에 박혔지만, 뇌는 그 부분만 절단된 기분이었다. 어디론가 선우의 그 기억의 뇌가 잘려서 쓰레기통에 버려진 느낌이었다. 그때의 선우도 함께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선우를 아프게 한 그 남자도 기억에서 지웠지만, 그 시간 그 장소의 선우 자신도 함께 미워했다. 선우는 그 순간의 자신을 미워했다. 수치스러웠다. 그리고 조용했던 자신이 미련했다. 그 남자를 증오하는 만큼 선우는 자신을 증오했다. 더 깊게, 더 바닥으로 자신을 끌어 내렸다. 주변 사람이 던지는 가벼운 위로와 그사이 스치는 경멸. 그 경멸은 선우의 마음을 불덩이로 지지는 듯했다. 하지만 가장 마음을 괴롭힌 건 그들이 아닌 선우 자신이었다.
선우는 또다시 조용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형원의 넓은 어깨가 공격적으로 보이는 순간. 그의 품에서 안겨 안전하다고 느꼈던 건 머나먼 옛날 같았다.
선우는 다시 생각했다. 울었던 형원이 차라리 부럽다. 그렇게 자신의 슬픔과 분노를 녹여낼 수 있어서 질투가 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밉다. 나는 여전히 이 자리에서 얼어붙은 채로 이 트라우마에 사는데 말이다.
선우는 자신을 비웃는다. 언제쯤. 언제쯤 나는 너와 있어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형원의 손이 선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선우는 반항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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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읽을 때 항상 숨쉬기 힘든 글이다. 내가 썼지만 힘들다. 그리고 저건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력감을 느낄 때를 좀 더 집중해서 파고들었다. 생각도 많이 한 부분이라 묘사나 비유가 더 깊을 수 밖에 없다. 다른 글도 이렇게 쓸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유발시키는 단편 소설.
적과의 동침이라는 제목은 같은 제목의 영화에서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