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에서 떨어진 허조에게 했던 세종의 말
나는 학창시절 조용한 아이에 속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조용하고 싶지 않았는데 조용하게 됐다. 선생님에게 잘보이고 싶어 숙제를 잘한 것 뿐인데 친구들의 질투를 사며 왕따가 됐고, 공부도 운동도 1등이 아니었으니 이렇다 저렇다 할 장점도 없는 아이였다.
그렇게 고등학생이 된 어느 날, 새롭게 부임한 담임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학교와 집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셨는데, 그게 나였다. 출석부 서기를 뽑는 자리였는데, 거리가 가까우니 가장 지각을 안할 것 같아서였다 한다. 한 번은 어떤 선생님이 출석 체크를 하던 중 오류가 있었는데, 그걸 내가 뒤집어쓰게 된 적이 있었다. 그 선생님은 내가 잘못한 것이라 다그쳤지만, 담임 선생님이 알고보니 그 선생님 잘못이었던 것. 내 잘못을 바로 추궁하기보다는 일단 상황을 파악한 후 침착하게 대처하시는 담임선생님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허 조도 나와 같은 마음을 느꼈을까? 하루는 종묘에서 춘향대제(왕실의 조상께 제사를 올리는 것)가 진행 중이었다. 세종의 주관 아래 많은 관리들이 참여하는, 진중하고 조심스런 자리였다. 모든 신하들은 일제히 제사 순서에 따랐고, 술을 올려야할 때가 왔다.
“어엇!” 술잔을 잡고 있던 허조가 갑자기 계단에서 떨어졌다. 엄숙한 분위기는 일순간에 깨져버렸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바라봤다. 제사는 멈췄고, 허 조는 얼굴이 벌겋게 타올랐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세종이 그에게 다가갔다.
세종 : 허 판서, 상하진 않았는가?
허조 : 송구합니다. 제가 발을 헛디뎌 그만….
세종 : 괜찮다. 여봐라. 종묘 계단을 넓히도록 하라. (7/1/14)
국가대사에서 벌어진 관리의 실수. 만약 ‘지금 무엇하는 짓인가! 감히 제사에서 실수를 하다니, 당장 이 자를 끌어내라!’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결과는 불보듯 뻔하다. 하지만 세종은 그가 고의로 한 행동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더구나 허조는 허리가 굽은 장애인이기도 했다. 자신의 실수를 덮어주고 오히려 더 편하게 다닐 수 있게 계단을 넓혀준 세종의 지시에, 허조는 자신의 맡은 바를 충실히 하는 것으로 보답했다.
세종은 허조가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쳐달라 청하면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디어를 내면 정책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정책 중 하나가 수령육기법이다. 수령의 근무 개월 수를 30개월에서 60개월로 늘린 것. 수령이 한 고을의 전문가가 될 수 있도록 한 법이었다. 지방에서 일을 해야한다는 말에 반대하는 관리들도 있었지만, 세종은 백성을 생각해야한다는 허조의 말을 따랐다.
“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시대에 죽으니, 천지간에 굽어보고 쳐다보아도 호연히 홀로 부끄러울 것이 없다. 내 나이 70이 지났고, 지위가 높았으며, 전하의 은총을 만나 간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셨으니, 죽어도 유한이 없다.” 허조는 71세로 생을 마감하며 아주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전해진다.
허 조와 세종과의 관계는 꼭 나와 담임선생님과 닮았다. 허 조가 세종에게 신하의 역할을 다했고, 세종도 그걸 인정한 것처럼. 나도 선생님께 좋은 학생이 되기 위해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착실하게 학생 역할을 이어갔다. 담임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에게 내가 연임할 수 있도록 추천해주셨고, 나는 3년 내내 사랑받는 서기로 활동할 수 있었다. 덕분에 고등학생 때는 왕따가 아닌 인정받는 서기가 되었고, 선생님의 관심을 발판 삼아 자존감이 높은 아이가 되었다.
사람은 때로 상황에 휘둘린다. 눈도 안보이고, 경황도 없어진다. 이때 중요한 건 이 상황을 바라보는 상대방의 관심이 아닐까. 그의 잘못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괜찮은지 물어보는 것. 아주 작은 관심으로 그를 도와주는 것. 상황이 아닌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계단을 넓히라는 배려가 돋보였던 세종을 보고 있노라면, 나이가 지긋하신 담임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