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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하연 Oct 05. 2023

마음을 표현하는데도 방법이 있다

황희의 탈정 기복

어렸을 때 나는 꽤 쉽게 키울 수 있는 아이였다. 잘 울지도 않았고, 그렇다할 사춘기도 없었다. 혼자 잘 노는 편이었고, 선생님의 말을 잘 듣는 학생이었다. 반대로, 내 오빠는 선천적으로 뇌가 다른 아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엄마는 항상 오빠를 우선했고, 어쩌다보니 나는 오빠의 보호자가 되었다. 그렇게 30년이 지났다.    

  

나는 서른 살이 된 기념으로 코칭 대학원에 갔다. 그곳에서 나는 말로 하는 인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는데, 배우면 배울수록 엄마가 내게 했던 표현에 대한 아쉬움이 커졌다. 오빠에게는 인정과 칭찬을 잘해주면서 왜 나에게는 한 마디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내가 힘들다고 하면 ‘인생이 원래 그런거지’ 라고 했고, 소리 죽여 우는 나를 왜 한 번 안아주지도 않았을까.      



나의 묵혀 왔던 울음을 한번에 터뜨리게 된 사건이 하나 있다. 

그건 내가 세종실록을 읽겠다고 결심한 후 처음 읽은 실록 기사다. 

    

“① 세자가 멀리 떠나는 것은 국가를 위하여 소중한 일이니, 그대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어찌하겠는가. ②그대는 정성스럽고 순수하여 화려하지 않지만, 깊고 무겁다. 지혜가 있어 정말 세상에 드문 지식인이며 세상을 보필할 큰 인재로다. (중략) 일찍이 태종과 만나 오랫동안 중대한 신하가 되었고, 덕이 부족한 나를 도움에 있어서는 내가 가장 신임하는 신하가 되어 계책을 생각할 때마다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였도다. 경은 슬픔이 깊기 때문에 그렇겠지만(황희 정승은 어머니의 삼 년 상(喪)을 치르는 중이었다.) ③내가 그대를 믿고 의지하는 간절한 심정을 어찌 가볍게 여길 수 있겠는가. 나의 간절한 마음을 힘써 따라서 그 직책에 나아가도록 하라. 사양하는 바는 마땅히 허락하지 아니하겠노라.” (9/10/8)   

  

이 기사는 세종이 황희에게 했던 말이다. 세자가 명나라 황제에게 인사하러 갈 일이 있으니, 황희가 세자를 모셨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는 세종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이유로 명을 거두어달라 청했지만, 세종은 황희를 붙잡고 싶은 마음을 고백했다. 그는 결국 명나라로 떠났다. 세종에게 그는 서른 네 살이나 많은 인생 선배이자, 믿고 배우고 싶은 신하였다.      


세종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쓴다. ①은 설득과 권유다. ‘~게 하라.’ 라는 강요가 아니다. 권위로서 누르지 않고, 오히려 나는 당신이 필요하다는 취약성을 드러낸다. ②는 좋은 점을 자세히 나열하는 것이다. ‘황희 정승, 그대는 좋은 사람이오.’라고 끝나지 않는다. ‘좋다’라는 말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정성스럽다. 순일하다. 화사하지 않다. 깊다. 무겁다. 지혜가 있다. 희대의 온식이다. 세상을 보필할 큰 인재다. 무려 8개의 장점을 찾아서 말해준다. 만약 “내가 무엇 때문에 좋아?”라는 질문을 건넨다면, 8개 이상의 장점을 말하는 게 쉽지는 않다. 반대로, 만약 상대방이 나에 대해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인정해주면 기분이 어떨까?     


③ 에서는 왕과 신하라는 위계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대한다. ‘그대를 믿고 의지하는 간절한 나의 심정’을 얘기하며,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정중한 청을 건넨다. 그저 왕권으로 누르지 않는 것이다.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절제다. 그저 “불허한다!”가 아닌, “내 명에 따르라!” 라도 아닌, 권유형의 문장과 상대방에 대한 구체적인 인정, 자신의 취약성을 드러내면서 권위를 내려놓는 포인트.      

세종실록을 읽으면서 엄마가 떠올랐다. 세종이 만약 우리 엄마였다면, 나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      

“아이고, 우리 딸. 많이 힘들었지? 공부하느라, 일하느라 수고가 많네. 엄마 딸이 무슨 일을 하든지 열심히 하고, 그 과정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걸 알고 있단다. 엄마도 말로 표현하고 싶은데 잘 안되어 안타깝구나. 그래도 내 딸은 늘 겸손하고, 말을 예쁘게 하며, 사랑스럽지. 마음도 따뜻하고, 늘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 작은 투정이 귀엽기도 하고, 누구보다 귀한 딸이란다. 그러니 딸아, 앞으로도 우리 잘 지내보자. 나도 너를 참 많이 의지한단다. 사랑한다, 내 딸.”     

 

엄마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사랑을 이야기했다. 타지에 있는 나에게 항상 캐리어에 가득 먹을 것을 해서 넣어주었고, 학창시절에는 야간자율학습을 마칠 때를 맞춰 항상 마중을 나온 엄마. 말이 아닌 행동도 사랑이 될 수 있음을 알지만, 나는 엄마에게 꼭 저 말을 듣고 싶다. 엄마, 나에게도 말로 표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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