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샌드박스, 제도의 실험실
기술은 달리고 있는데, 제도가 못 따라오는 것이 아닐까?
정부 주도로 정책적으로 산업을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기술의 속도는 늘 제도보다 빠르게 성장한다. 이미 생성형 AI를 통해서 스스로 글을 쓰고, 음악을 작곡하고 있지만 저작권은 사람에게 종속된다. 자율주행차의 경우에도 도로를 달리고는 있지만 사고가 났을 때 운전자가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제조사인지 해당 차량을 구매한 사람인지 등 말이다.
우리는 기술이 눈 깜짝할 사이에 성장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제도가 성장하는 게 느리다고 이야기를 해야 할 수도 있다. 제도가 기술의 성장을 따라가지 못하여서 이미 성장한 산업을 규제라는 이름으로 싹을 자르기도 하고, 어떨 때는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는 안정장치로써의 작용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서 각국에서 등장한 개념이 있다. 바로 규제 샌드박스(Regulatory Sandbox)이다. 샌드박스 말 그대로, 어린이들의 모래사장 놀이터로부터 유래하였다. 아이들이 모래밭 안에서는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지만 울타리 밖에서는 위험 때문에 마음껏 놀 수 없는 구조. 즉, 위험을 통제하면서도 자유를 허용하는 구조적 장치이다.
정부는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서 규제를 완화해 새로운 기술과 산업을 실험해 볼 수 있는 제도적인 놀이터를 만들었다. 때론 혁신이 금지의 벽에 막히지 않도록 일정한 울타리 안에서 자유롭게 시험해 볼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이다. 기존의 법규가 신기술의 시도를 원천적으로 막는 상황에서, 자국의 산업 발전을 저해할 수 있거나 미래 성장동력이 될 수도 있는 기술의 싹을 자르지 않도록, 한시적이고 제한된 조건 하에 실험을 허용하는 제도이다. 규제의 유예라고 하기보다는 사회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의 안전한 실패를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실험이다.
기존의 전통적인 규제방식은 사전규제 형식으로 허가를 받아야 시도를 할 수 있지만. 샌드박스는 사후조정 방식으로 우선 실증을 통해 검증을 하고, 필요하면 그 결과를 반영하는 방식이다. 이와 동시에 실증을 통한 검증 결과가 좋다면 입법을 하던지 제도적으로 보완을 하기도 한다. 이런 형식으로 혁신과 규제를 함께 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영국의 핀테크 샌드박스
영국은 2016년 세계 최초로 핀테크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하였다. 당시 영국의 금융규제는 은행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모바일의 성장에 따라서 핀테크 시장도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이러한 규제들 때문에 성장폭이 줄어들기도 하였다. 핀테크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새로운 서비스를 시도하기 위해서 막대한 인허가 비용 그리고 시간이 필요하였다. 초기 투자 금액이 적은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이러한 행위조차도 치명적이었다.
이때 영국의 금융감독청(FCA)은 통제 가능한 위험 속에서 핀테크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하기로 하였고, 6개월 단위로 기업들이 실제 고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할 수 있는 제도가 생겼다. 그 과정에서 기업들이 200여 개 탄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제도들이 전 세계적으로도 확산이 되어서 규제샌드박스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규제 샌드박스 : 네 개의 제도
우리나라는 2019년부터 본격적으로 규제 샌드박스 제도가 도입이 되었다. 법적으로도 규제 샌드박스 4 법이 생겨서 시행이 되었다. 규제 샌드박스 4개 법은 총 4개의 정부부처가 관할하는 법으로, 각각 △정보통신융합법(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융합촉진법(산업통상자원부), △금융혁신지원특별법(금융위원회), △지역특구법(중소벤처기업부)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각각 ICT융합, 산업융합, 혁신금융, 규제자유특구 분야로 나위었고, 19년을 시작으로 점점 다양한 부처로 확장이 되면서 현재는 스마트도시(국토부 산하 국토교통과학기술진흥회), 연구개발특구(과학기술정보통신부), 모빌리티 (국토부), 순환경제(환경부) 등 8개 샌드박스 홈페이지가 생겨났다.
각 부처의 주요 역할에 맡게 담당 분야를 정해서 샌드박스를 운영하고 있지만, 샌드박스를 운영하는 목표는 결국 하나이다. 기술혁신이 제도의 틀 안에서 멈추지 않고 발전할 수 있겠다는 목표이다. 전통적인 제조업 외에도 미래 먹거리를 육성하기 위해서 만든 제도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제도 아래에서 실증특례, 임시허가, 신속 확인 등 세 가지 방식을 통하여 샌드박스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 5화에서 로봇은 공장과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에서 다루었던 것과 같이 샌드박스를 통해서 제도를 실험한다. 05화 로봇은 공장과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이 외에도 공유 모빌리티 기업 같은 경우에는 기존 여객운수법의 제약 속에서도 실증특례를 받아서 서비스 시험을 하거나, 전기차 충전기 설치, 드론 배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임시허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4개 부처에서 규제 샌드박스에 대한 법률을 바탕으로 샌드박스를 운영하고 있지만, 더 나아가기 위한 과제가 여전히 남아있다.
부처 간 권한이 분산이 되어 있기 때문에 기업은 복잡한 절차를 여전히 거쳐야 한다. 대기업의 경우에는 대관 업무를 하는 부처가 있지만, 스타트업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절차를 알아가는 데 있어서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또한 실증이 끝난 이후에도 상용화가 되기 위해서는 입법 절차를 통해서 법제화가 되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도 다른 이해관계자들의 반대 또는 관심의 부족으로 인해서 법제화가 늦어질 수도 있다. 결국에는 혁신의 문을 열긴 했지만, 그 문 뒤의 길은 아스팔트 길이 아닌 비포장 도로처럼 아직 갈 길이 먼 셈이다.
우리나라의 규제 컨트롤 타워 국무총리실
샌드박스 제도 외에도 우리나라의 국무총리실에는 '규제개혁위원회"라는 것이 존재한다. 우리나라의 모든 법령 그리고 행정규제에 대해서 사전, 사후 심사를 수행하는 최상위 규제 컨트롤 타워이다. 위원회의 구성은 민간전문가 그리고 정부관계자로 구성되어 있다. 각 부처가 신설하거나 개정하려는 규제안이 실제로 필요한지, 기업 활동이나 국민 생활을 제약하지 않는지 등을 검토한다. 새로운 규제를 만드는 문턱을 낮추고 기존 규제를 걷어내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위에서 언급했던 부처 간 권한이 분산되어 있는 것을 개선하기 위해서 정부는 2024년 규제개혁위원회 산하에 신산업 규제혁신위원회(혁신위) 기능을 확대하여 조정 역할을 맡길 계획을 세웠다. 그동안 사업자가 규제 담당 부처에 규제 특례를 신청하여야 했는데, 앞으로는 부처가 직접적으로 나서서 규제 개선 과제를 선제적으로 발굴하고 해당 사업자에게 규제특례를 부여하는 기획형 샌드박스 제도를 병행한다는 것이다.
신산업 규제혁신위원회를 통해서 정부는 이해관계자와 규제부처 반대가 심한 사안의 경우에는 이견을 조정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겠다고 한다. 또한 산재되어 있는 8개 샌드박스 홈페이지를 통합 포털에서 볼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는데, 조금 더 지켜봐야 하는 것이라고 본다.
샌드박스 제도와 연계를 하여서 샌드박스를 통해서 얻은 실증데이터를 분석하여, 실제 법령을 개정하거나 폐지를 할 때 참고하도록 유도를 한다거나, 정부 부처별 평가를 할 때 해당 지표를 포함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정부 규제를 컨트롤하려고 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부는 규제개혁위원회를 통해서 규제를 없애는 곳이 아니라, 좋은 규제를 설계하는 곳으로 진화하려고 하고 있다.
앞으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위원회의 위원으로 위촉되어서, 우리나라의 신산업이 발전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또한 규제샌드박스 제도 자체가 단기적으로는 임시 면허증과 같이 초기 진입을 도와주기는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단순히 임시 면허증이 아니라 공식적인 면허증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특정 기업에게만 일시적인 예외를 지속적으로 주기보다는, 그 실험 결과를 제도 전체 개선으로 연결을 하는 것이다. 샌드박스를 통해서 서비스를 성공적으로 검증했다면, 그 결과를 바탕으로 정부는 특정 기업에 대한 특혜가 아니라 산업 전체 규제 개선으로 확산되기 위해서 빠른 검토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1) 서비스 평가 2) 데이터 축적 3) 사후 입법화의 3단계를 제도적으로 마련을 하여야 한다. 또한 국민들에게 규제는 혁신을 위해서 막는 적이 아니라, 혁신을 위한 안전망 또는 보루라는 관전의 전환을 심어줄 필요도 있다. 규제가 많아서 혁신이 불가능하다기보다는, 혁신으로 인해서 나올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제도를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국가
앞으로 국가의 역할 중에 하나는 제도를 실험할 수 있는 나라를 구축하는 것이다. 기술에 대한 R&D 예산 투자도 중요하지만, 제도를 다양한 형태로 실험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기술혁신에 대한 속도는 민간이 정부정책과 합이 맞아서 주도를 하게 되지만, 제도 혁신의 속도는 결국 정부가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에, 국가 경쟁력은 기술의 성취보다는 정책의 유연성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규제샌드박스는 이미 5년이 넘는 시간을 거쳐서 초기 실험단계를 넘었다. 기술적인 규제 샌드박스를 넘어서 정책 샌드박스로써도 확장이 될 필요가 있다. 기술뿐만 아니라 정부의 정책 자체도 기초자치단체 등 특정 단위에서 실험하고, 실패를 통해서 학습을 할 수 있도록 고려가 되어야 한다.
규제라는 것이 단순히 금지를 하는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이해관계자 그리고 정부 등 사이에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갈 수 있는 플랫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완벽한 규제는 없다. 다만, 좋은 규제가 되기 위해서는 실패를 어느 정도 허용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데이터(배움)를 남기고, 배운 것들을 다음 제도로 반영을 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정책적 제도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