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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나온 Sep 19. 2024

#4. 아기 무 13개의 기적

텃밭의 시간9


#4. 아기 무 13개의 기적     

우리는 깍두기를 담그기로 했다. 2학년을 데리고, 김장이라니.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우리를 김장으로 이끈 데에는 애초에 텃밭에 관심이 하나도 없었던 시크한 막내 선생님 덕분이다.      

때는 수확을 앞둔 한 달 전쯤. 한창 무가 푸르게 커 가고 있을 즈음의 학년 회의 시간이었다.  막내 선생님이 말했다.      

"무 수학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     

나는 특별한 계획이 없던지라 그냥 덤덤히 답했다. 

"글쎄요. 생각 안 해봤는데……. 그냥 집에 보내서 국 끓여 먹으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자 막내 선생님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깍두기 만드는 건 어때요?"     

그 말에 1반 부장님이 얼른 맞장구를 치셨다. 

" 어? 좋지, 좋지!     

물론 당황스러움으로 눈이 동그래진 8반 총각 선생님도 있었다. 

"깍두기? 2학년 애들을 데리고?     

 교실이 어떻게 되겠냐, 뒷감당이 가능하겠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간단하다, 무를 썬 뒤 양념을 버무리기만 하면 되는데 못할 것이 뭐가 있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 까짓거 깍두기 해 보지 뭐!"     

텃밭 농사의 대서사시는 김장이라는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소금, 고춧가루, 마늘, 찹쌀 풀, 액젓 등 깍두기를 제대로 하려면 다양한 양념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깍두기를 만드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하고 김장 양념을 사기로 했다. 국산 재료로만 만들고 평이 좋은 곳으로 신중히 골랐다. 학교에서 식품을 다루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다. 자칫 단체로 식중독에 걸리는 사태가 발생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주먹만 한 무로 깍두기를 만들어 반 전체가 나누어 갖기에는 양이 적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반별로 큰 무를 몇 개씩 더 샀다.

 아이들에게 칼을 쥐여주기 걱정스러웠던 나는 김장 전날에 모든 무를 깍둑무로 썰어 두었다. 커다란 무 다섯 개와 아기 무 13개를 썰었는데, 부끄럽게도 이런 대용량의 칼질은 태어나 처음 해보았다. 그것 좀 썰었다고 엄지가 엄청 아팠다(물집이 잡힌 선생님도 있었다).

 드디어 대망의 깍두기 담그는 날이 밝았다. 아이들이 아침부터 앞치마에 머릿수건을 장착하고 한껏 들떴다. 우리는 모둠별로 책상을 붙이고 주의 사항을 이야기했다. 칠판에 안전, 청결, 배려 세 단어를 썼다. 

 깨끗하게 손을 씻고, 책상 위도 소독한 뒤 썰어 둔 깍둑무를 모둠별로 볼에 담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적당량의 양념도 배분했다. 이제 모둠원 네 명이 돌아가며 양념과 무를 버무리는 것이다.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한가득하였지만 다들 자기 차례가 오면 진지하게 조물조물 손을 움직였다. 하얀 무가 빨간 양념 옷을 입고 맛깔스럽게 변했다. 달큼짭조름한 김치 냄새가 진동했다. 절로 침이 고여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다 비볐으면 각자의 반찬통에 고르게 담아 갈 차례다. 어떤 아이는 너무 작은 반찬통을 가져왔다며 엄마를 원망했다. 사실 마트 무 다섯 개가 추가되지 않았다면 그 아이가 가져온 주먹만 한 반찬통이 제일 적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었던 기적처럼, 텃밭 한 상자에서 나온 13개의 아기 무가 22명의 반찬통에 가득가득 차는 기적을 이루어냈다.      

 "자, 이제 맛을 봅시다. 매우니까 딱 한 개만 먹어 보도록 해요."     

  평소 김치라면 질색하던 애들도 너무 맛있다며 자꾸 집어 먹었다. 요놈들, 거봐라. 맛있지? 후후. 아이들은 뿌듯해하며 깍두기를 집으로 가져갔다. 다음 날이 되었다.      

"선생님, 우리 엄마가 우리 집 김치보다 더 맛있대요. 양념 어디서 샀는지 알아 오래요."     

 어머님 입맛에 맞으셨다니 이리 흡족할 수 없었다. 그 후로도 몇 날 며칠이 으쓱했다. 맛있는 깍두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치를 건드리지도 않던 애들이 급식으로 나온 김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급식 깍두기가 맛있어, 우리 깍두기가 맛있어?”

 “우리 집 깍두기는 벌써 셔. 너는 익은 김치가 좋아, 안 익은 김치가 좋아?”     

 나는 그들의 대화에 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 배추김치는 언제 만든 것일까?”

 “이 깍두기 무는 누가 심은 걸까?”     

 우리가 만든 깍두기엔 시간이 담겨있었다. 우리 깍두기가 특별히 맛있던 이유는 우리가 깍두기의 시간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햇빛과 흙이 공들인 시간, 물을 주며 함께 자란 시간, 노래가 스민 시간, 비바람을 견뎌 낸 무의 시간. 그래서 맛을 음미하고, 시간을 느끼며, 감사할 수 있던 것이다.

 2학기 상담 주간에 한 부모님이 얘기해 주신 것도 있다. 아이가 단것만 좋아했는데 상추도 싸 먹고 김치도 먹는 게 기특하다고. 이유식 입맛에서 벗어나 초딩 인생의 쓰고 매운 맛도 배운 것 같다며 함께 웃었다. 

 나는 쓴맛, 매운맛에 도전했을 아이의 용기에 대해 생각했다. 낯설고 두려운 맛에 도전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불쾌함을 인내했을 것이며, 그럼에도 결국 삼키고 소화해 낸 아이의 시간. 그건 인간의 정신적 성장 과정이었다. 

 생각해 보면 모든 음식에는 인류가 공들인 시간이 담겨있다. 수백만 년 동안 맛보기를 시도하고, 인간의 몸에 적합한 것을 찾아내고, 무엇을 경작할지 선택하고, 어떻게 요리할 것인지 연구한 것들이 무수히 축적된 결과. 인류의 시간만 담겨있겠는가. 오랜 시간 많은 별이 탄생하고 죽는 과정 속 별들의 잔해에서 지구가 탄생했다. 우주의 빛과 광물이 식물과 동물을 탄생시키고 인간의 몸도 탄생시켰다. 인간이란 소우주는 음식을 통해 외부의 다른 우주를 받아들인다. 다른 우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잘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요리하는 과정, 소화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요리와 소화 과정에서 한 우주는 죽는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흡수하면 죽은 우주가 우리 몸에서 다시 살아난다. 그러니 음식은 천천히 음미하며 먹어야 한다. 이 시간을 감각할 수 있도록 천천히. 그 시간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 기르는 것이 교육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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