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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사진장이 Dec 29. 2021

아내를 분노케 만든 마성의 된장찌개

소소잡썰(小笑雜說)

"8,000원이요? 와, 그새 가격이 많이 올랐네요!"

서울서 놀러 내려온 친구들 중 A가 지나가는 말처럼 이렇게 한 마디 하자 식당 사장님은 무슨 천부당 만부당한 소리냐며 펄쩍 뛰셨다. "저희가 이 자리에서 50년 넘게 장사해 왔는데, 가격 비싸단 얘긴 처음 듣습니다"라는 게 사장님의 항변이었다. 전북 부안에서 55년째 백반집을 운영 중인 유서 깊은 식당에 갔다가 생긴 일이다.


식당 사장님이 펄쩍 뛰자 A는 "그래요? 전 친구한테 1인분에 6천원이란 얘길 듣고 왔거든요" 하고 변명하듯 말했다. 내막을 잘 알지 못하는 나는 무심코 '6,000원에서 8,000원이면 무려 30% 넘게 가격을 인상했구만. 많이 올랐다는 표현도 그리 틀린 건 아니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요즘 재료비니 뭐니 물가 상승률이 너무 높아 자영업자들이 많이 힘들단 얘긴 들었지만, 30%대 가격 인상이면 그렇게까지 펄쩍 뛸 일은 아니지 싶어서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식당 사장님은 더더욱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또 한 번 펄쩍 뛰셨다. 마치 능욕이라도 당했다는 듯 낯빛이 안 좋았다. 그러더니 "그 친구분 도대체 언제 저희 식당에 다녀가셨답니까?" 하고 물어왔다. 그가 언제 다녀간 게 이 대목에서 왜 궁금할까 궁금했지만, 굳이 묻진 않았다. 묻지 않아도 곧 대답이 튀어나올 기세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식당 사장님은 A의 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저희 식당은 그동안 10년에 한 번씩, 그것도 딱 1,000원씩만 가격을 인상했습니다. 친구분이 6,000원일 때 다녀가셨으면 최소 십 몇 년은  됐단 얘기죠" 하고 말을 이었다. 그제서야 우리 일행은 식당 사장님이 가격 많이 올랐단 말에 그토록이나 펄쩍 뛴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서민적인 음식의 대명사인 짜장면과만 비교해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20년 전 한 그릇에 평균 2,500~3,000원 하던 짜장면은 최근 5~6,000원을 오르내리고 있다. 짜장면엔 매우 진심인 편인 내 단골집 중엔 심지어 한 그릇에 12,000원 하는 집도 있다. 반찬이라곤 달랑 단무지와 양파 몇 쪽 주는 게 전부인데 말이다. 그런데 정성껏 차려낸 반찬 20여 가지를 곁들인 백반 한 상이 8,000원 하는 걸 두고 가격이 많이 올랐니, 비싸니 타령을 하는 건 식당 사장님 입장에선 능욕에 가까운 시비가 아닐 수 없었다.


20년 동안 2,000원을 인상했을 뿐이라는 말을 들은 A는 즉시 꿀먹은 벙어리가 됐다. 자기 딴엔 치밀한 사전조사를 통해 일행에게 가성비 좋은 식당을 추천해줬다고 생색도 낼 겸, 식당 사장님에게도 나름 아는 척을 한답시고 한 마디 던졌던 모양인데, 업데이트가 제대로 안 된 반쪽짜리 정보에 의지하다 보니 그만 큰 실례 수준의 실언을 해버린 셈이 됐기 때문이다.


특히 예의 식당 입장에선 단골 손님들 주머니 사정을 배려해 주느라 가격 인상 억제를 위해 죽어라 노력해 왔던 모양인데, 뭣 모르는 손님놈 하나가 어줍잖은 말 한 마디로 그런 노력에 상처를 내버렸으니 발끈하며 성을 내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일 지경이었다. 몇 만원짜리 한정식 부럽잖은 뻐근한 상차림에 더해 대부분의 식재료를 국산으로만 엄선해 차려낸 정성까지 감안하면 A의 가격 인상 타령은 사실 도발을 넘어 망발에 가깝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결국 A는 식당 사장님에게 백배 사과를 드렸다. 어설프게 주워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한 무지의 소치라곤 해도 8,000원짜리라곤 믿기 힘든 그 뻐근한 상차림을 보고서는 사과를 안 할래야 안 할 도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같은 망발을 곁에서 수수방관한 우리 일행조차 죄송한 마음이 들 정도였으니, A 본인이야 오죽했겠는가. 더더군다나 엑스트라 하나 없다 싶을 만큼 제 각각의 맛을 자랑하는 주조연급 반찬들은 물론, 겸손한 자세로 리필을 부탁하게 만드는 마성의 된장찌개 맛은 우리 일행을 끝내 백기투항하게 만들고야 말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아내와 함께 부안 쪽으로 드라이브를 갔던 길에 예의 식당을 다시 한 번 방문했다. 아내에게도 꼭 그 집 백반 맛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반찬이 다 차려지기가 무섭게 나는 상 운데 자리잡은 된장찌개를 가리키며 "이거 한번 먹어보시오. 국물이 진짜 예술이더라구" 하고 권했는데, 뜻밖에도 아내는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째려봤다. "집에서 김치찌개 끓여줄까, 된장찌개 끓여줄까 물으면 백이면 백 김치찌개 하길래 난 우리 남편이 된장찌개를 싫어하는 줄 알았지. 근데 우리 남편께선 된장찌개가 싫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네, 호호" 하는 말과 함께였다.


아차 싶으면서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뒤끝이 꽤 있는 아내인지라 앞으론 집에서 김치찌개 혹은 된장찌개를 끓여낼 때마다 한 번씩 사골국처럼 두고두고 우려먹을 재료를 제공하고 말았다는 뒤늦은 후회가 후두부를 강타했다. 그냥 "이집 백반이 참 맛있더라구"까지만 했으면 좋았을 걸 왜 뜬금없이 된장찌개 예찬론은 펼쳐서는 기어이 없는 사달을 만들고야 말았다. 하여간 인간은 어딜 가나 입조심을 해야 한다 싶었다. 몸으로 지은 죄는 산과 같사옵고 입으로 지은 죄는 바다와 같다 했건만 그 바다를 메우려면 몸으로 산 몇 개를 허물어야 하나...




방송이다 블로그다 PPL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보니 간접광고로 오해할 소지가 있어 식당 이름은 부러 밝히지 않았다. 정말 가보고 싶은 분이라면 내 글 속에 있는 힌트만 조합해도 충분히 찾을 수 있으리라 판단되고, 굳이 세상에 널리 알려 편하게 이용하던 애정하는 식당 앞에 길게 줄을 서야 하는 불상사를 자초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쪼끔(?)은 있어서다. 다만 정말 모르겠어서 개별적으로 물어오는 분께는 기꺼이 알려드릴 의향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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