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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비 Nov 20. 2024

또 하나의 세계

아가, 그럼 도서관에 가 보는 건 어때?

 

아이는 사람을 좋아한다. '관계지향적이다'라는 말로 납작하게 표현하기 힘든 수준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게 누구든) 사람을 좋아했고, 잘 따랐으며, 꼭 주 양육자가 아니어도 쉽게 마음을 기대고 사랑받는 재주가 있는 아이였다.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되면서는 내 표정을 쉽게 간파하고 조금이라도 어둠이 드리우면 쪼르르 다가와 말간 얼굴로 애교를 부렸다. 좋은 것, 고마운 것, 맛있는 것 모두 잊지 않고 상대에게 표현으로 돌려주는 아이였다. 제대로 말을 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는 마치 하루에 쏟아내야 하는 소통의 양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말을 했는데,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정말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았다. 친구들과 즐겁게 노는 와중에도 틈틈이 자신의 현 상황을 나에게 쪼르르 달려와 공유했고, 혼자 TV를 보다가도 (가령 내가 곁에 없고 주방에서 설거지 중이면) 다급하게 달려와 현재 보고 있는 영상물의 진행 상황을 실시간 중계를 하며 소통하기를 원했다. 그저 엄마와의 소통을 좋아했던 것 아니냐고 묻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아이는 그저, 누군가와 '마음'이 맞닿아 있는 모든 순간을 갈구하는 성향을 가진 아이였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1학년 첫 학기는 등굣길에 함께 했다. 손을 마주 잡고 걷는 그 길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조금씩 홀로서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2학기에 접어들면서 혼자 등교하는 연습을 시작했는데 그 때 아이는 매일같이 "외로워"를 남발했다. 나의 사랑이, 나의 품이 그리운 걸까 마음이 찌르르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외롭다는 표현이 보통의 의미와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동선이 맞았던 어떤 날 오랜만에 함께 등굣길을 걷고 있었는데 제 친구들을 발견하자 나에게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냉큼 친구들을 쫓아 달려가는 게 아닌가. 그날의 당혹감이란. 아이의 외롭다는 말은 그저 혼자 있기 싫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것이 한 편으로 꽤 염려되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여러 사람과 유대를 맺고 사는 것은 맞지만, 실상 생을 산다는 것은 사사로이 외로운 혼자만의 사투들도 꽤 많음을 알고 있어서였다. 아무리 (물리적으로) 주변에 사람이 가득해도 결국은 혼자 감내해야 하는 것들이 있게 마련인데, 아이는 그 부분이 유약한 건 아닐까. 그걸 길러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실제 이 주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이는 내 설명을 이해하면서도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듯했다.)


최근, 다시 아이가 말을 꺼냈다. "엄마, 나 집에 혼자 있을 때 기분이 좀 안 좋아." 학년도 바뀌었고, 대부분의 동선은 혼자 다니고 있고, 심지어 때때로 친구들과 자유 놀이를 하러 훌쩍 외출을 하기도 하는 아이. 올해 강의 시간이 오후에 배치되면서 월요일과 수요일마다 아이는 방과 후 약 한 시간 동안 혼자 집에서 쉬다가 학원 차를 탈 시간 맞추어 나가는 일정을 보내고 있다. 그 한 시간의 텀이 어쩐지 아이에게는 자유로움이 아니라 공허함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나라면 에헤라디야 신이 나서 티브이를 보거나 맛있는 간식을 먹으며 유유자적 시간을 보낼 것 같은데,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럼 있잖아, 혹시 그 시간에 도서관에 가 보는 건 어떨까?"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그 시간을 홀로 버티기 힘들어하는 아이가 짠했다. 혼자 있는 공간에서의 고요함을 나 역시 불편해하는 터라 어느 정도 아이의 마음을 이해해 주고 싶었다. 문득 학교 도서관이 생각났고 툭 던지듯 무심하게 말을 꺼냈다. 아이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쉬는 시간 10분이나 수업 시간 같은 시간적 제약 없이 자유롭게 도서관에서 제가 보고 싶은 책들을 뒤적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던 건지, 밀폐된 공간에 혼자 있지 않고 탁 트인 공간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인 건지, 아니면 그저 새로운 대안을 발견했다는 감탄인지 모를 일이었다. 아이는 정말 그래도 되냐고 재차 물으며 신이 나서 등교를 했다. (자기는 책을 좋아한다던 아이의 말이 귓가를 스친다. 와우.)


월요일, 나의 제안을 듣자마자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학원차를 탔던 아이가 보고 싶었던 책을 자유롭게 보았다고 좋았다는 피드백을 들려주었다. 사서 선생님이 별말씀 안 하셨다고 하는 걸로 보아 아이는 방과 후에 도서관에 가면 안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염려를 했던 것도 같다. 오늘 수요일, 아침부터 아이는 내게 여러 번 강조한다. "엄마, 나 오늘 집에 안 오고 도서관에 있다가 바로 학원 갈 거야!" 으레 집에 도착하면 탭을 이용해 서로 연락할 수 있는 메신저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자신으로부터 연락이 없어도 걱정 말라는 당부가 이어진다. 집을 나서는 아이의 발걸음이 구름결처럼 가볍다. 아무래도 앞으로 쭉 아이는 빈 시간을 도서관에서 책들에 둘러싸여 살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아이의 외로움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민이 많다. 자신만의 강점일 수도, 단점일 수도 있겠으나 그저 아이만의 고유한 특성으로 바라보기로 한다. 아이의 세계 하나가 열렸다. 꼭 집이 아니어도 제가 비빌 언덕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일 수도 있고, 혹은 이전과는 달리 도서관에 녹여낼 저만의 의미가 다차원적으로 펼쳐지는 계기일 수도 있겠다. 집에 돌아가면 아이에게 물어보아야겠다. 오늘 너의 도서관은 어땠느냐고, 사람 대신 책에 둘러싸인 시간을 마음껏 누렸느냐고. 문득, 한없이 외로웠던 어린 날의 내가 고개를 슬며시 든다. 너의 외로움이 책으로부터 치유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거창한 바램도 마음에 품어본다. 엄마인 내가 외로울 시기마다 책이 참 좋은 친구가 되어준 것처럼 너에게도 도서관이, 혹은 책이 그런 빛이 되어주면 좋겠다는 욕심도 부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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