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효원과 혜미
손님이 없는 시간에는 가만히 앉아있어도 자꾸만 머릿속에 석호가 맴도는 여름이었다. 마음이 심란할 땐 몸이라도 움직여야 했다. 한 손에 먼지떨이를 든 채 힘차게 매장을 돌아다니는 여름의 뒤로 한 손님이 서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교복 차림의 학생은 효원에게 이끌려 종종 서점에 왔던 동하였다.
“안녕하세요.”
동하가 여름에게 꾸벅 인사를 건넨 뒤, [가정·육아] 서가로 향했다. 혼자 서점을 찾은 동하가 어색했지만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라고 말한 뒤 다시 에세이 매대로 눈을 돌리는 여름이었다.
책을 정리하다 보면 가끔씩 평소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글귀들을 발견하곤 한다. 『여러 말보다 한 권의 책』, 한동안 마음의 여유가 없어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책이었다.
다시 카운터로 돌아온 여름이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그녀가 한 권의 책을 읽을 동안 서점에는 여러 손님이 방문했고, 그렇게 몇 번의 책갈피와 여러 장의 포스트잇이 붙고 난 뒤 여름은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새로이 책을 주문하며, 자신만의 손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하는 여름이었다.
가끔은 여러 말보다 한 권의 책이 위로를 줄 때가 있어요.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선 끝이 있어야 한다고 얘기해 주는 책이에요.
지금의 아픔이 어떤 엔딩을 가져올지는 모르지만 그때까지 잘 버텨낼 수 있기를,
이 시간이 무사한 내일을 만들어줄 수 있기를. 우리 모두에게 말이에요.
언제부턴가 여름은 자신이 인상 깊게 읽은 책에 꼭 손글씨를 적어놓곤 했다. 책을 통해 자신이 느낀 감정은 때로 손님들이 책을 고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였다.
“운아… 아니, 여름씨! 오랜만이야.”
책을 정리하려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름의 앞으로 백일떡과 선물세트가 놓였다. 고개를 든 여름의 앞에 돌잔치를 막 끝내고 온 영일이 서있었다. 자세한 얘기는 추후에 복귀하면 해주겠다며, 예쁜 딸과 산모의 이야기부터 전하는 그의 얼굴은 많이 편안해져 있었다. 반가움도 잠시, 여러 안부를 채 묻기도 전에 그의 입에서 석호의 이름이 나왔다.
“… 석호 얘긴 들었어. 참, 유감이네. 여름씨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싶고.”
그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이윽고 그를 향해 작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여름이었다.
“금방 찾을 거예요. 오빠, 꼭 돌아올 거예요.”
그런 여름을 보며 영일이 깊은숨을 내쉬고는, 예린이 기다리고 있어 얼른 가봐야 한다며 황급히 서점을 나섰다. 손에 떡과 답례품이 더 들려있는 걸 보니 아마 봉석에게도 전해주고 갈 모양이었다. 그의 뒷모습을 보는 여름의 마음이 미어졌다. 만일 이 자리에 자신이 아닌 미화가 있었다면, 영일은 선물을 전해주었을까. 문득 미화부터 떠올리는 여름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
가끔 효원을 따라 서점에 오긴 했지만, 혼자 책을 보러 온 건 처음이었다. 계절서점은 동하에게 낯선 공간이었다. 특히 [가정·육아] 코너는 더더욱 그랬다. 여러 가지로 분류된 소코너들 중에서도 동하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임신과 출산] 카테고리였다. 동하의 손가락이 진열된 책들의 제목을 쭉 훑으며 지나갔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가 최대한 많은 정보를 알 수 있는 책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사이, 카운터에서 영일과 여름의 대화가 들려왔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당시 종종 담배를 사러 오던 아저씨였다. 그는 휴가 중인 것 같았고, 이제 막 돌잔치를 끝낸 듯했다. 동하가 책을 고르다 말고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얼마 있지 않아 서점을 나서는 영일의 뒷모습이 보였다. 황급히 여름에게 인사한 뒤, 동하가 그의 뒤를 쫓았다.
그가 향하는 곳은 봉석네 편의점, 그러니까 동하의 옛 일터였다. 방금까지 환하게 웃고 있던 영일은 봉석과 무슨 얘기를 하는지 꽤나 심각한 표정이 되어 있었지만, 지금 동하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영일의 조언을 얻어야 했다. 동하가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서자 동시에 쳐다보는 봉석과 영일이었다.
“뭐여, 이 시간에 웬일이여?”
봉석의 물음에 동하가 꾸벅 인사해 보였다. 이윽고 동하의 시선이 영일에게로 향했다.
“임신했을 때, 어떤 책이 제일 도움 돼요?”
그를 보는 영일의 눈이 깜빡였다.
*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관에 놓인 카드키를 챙겨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동하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전히 소파에 누워 잠들어있는 효원이 보였다. 너무 많이 울어 지친 건지, 아니면 마음이 편해져서인지 알 수 없었지만 곤히 잠든 효원의 모습은 편안해 보였다. 동하가 서점에서 받은 비닐봉지를 내려둔 채 가만히 옆에 앉아 효원의 손을 잡았다.
“동하니?”
그런 뒤로 혜미의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동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그제야 퉁퉁 부은 눈으로 잠에서 깨는 효원이었다. 사실 혜미는 몇 주 전부터 효원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부를 하는 효원의 모습은 유난히 예민하고, 힘들어 보였다. 단순히 수험생이 되어 그렇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더 열심히 효원을 챙겨야겠노라 다짐한 혜미였다. 그러나 이상함을 느낀 건 효원이 가장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그날부터였다.
혜미의 된장찌개라면 아무리 입맛이 없어도 밥 한 공기는 해치우는 효원이었다. 그런데 유독 입에도 갖다 대지 못하는 아이를 보며 혜미는 알 수 있었다. 효원이 입덧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엄마라서 알 수 있는 느낌이었다.
“충분히 서로 얘기한 거니?”
혜미가 효원을 가졌을 적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딸은 엄마 팔자를 닮는다는데, 혹시나 효원이 자신과 똑같은 인생을 살게 되는 건 아닐까. 행여나 그렇게 된다면 난 내 딸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줘야 할까, 스스로에게 몇 날 며칠을 질문하며 밤을 새웠던 혜미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그때의 혜미가 자신의 부모로부터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다.
“엄마가 된 걸 축하해.”
라고. 눈시울이 붉어진 혜미를 보는 효원과 동하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날, 그렇게 마주한 셋의 대화는 새벽이 지나도록 길게 이어졌다.
“대학은 어떻게든 엄마가 보내줄 거야.”
효원은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하기로 했다. 대학 진학을 잠시 미루더라도 산모의 건강부터 챙기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한 혜미였다. 효원이 아이를 건강하게 출산하고 난 뒤늦지 않게 검정고시를 준비하기로 약속했다.
동하는 수시입학을 목표로 공부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진 혜미가 효원의 보호자 역할을 해줄 것이었다.
“저, 어려서부터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습니다. 생활력 하나는 자신 있어요!”
성인이 된 후부터는 동하가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지기로 했다.
“그리고….”
혜미의 허락과 함께 두 손을 꼭 맞잡은 동하와 효원이 입을 여는 혜미를 쳐다봤다.
“아이 낳으면, 바로 결혼부터 해.”
18살, 임산부였던 혜미에게 찾아온 외로움은 감당하지 못할 아픔으로 남아있었다. 오래 만나온 남자친구와의 단순한 호기심은 자신을 돌이킬 수 없는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가족들은 자신을 외면했고, 유일하게 내 편이 되어줄 줄 알았던 그 사람까지도 무책임하게 자신을 떠나버렸다. 남들에게 미혼모라고 손가락질당하던 그 시절을 엄마의 힘으로 어떻게든 버텨낸 혜미였다. 그랬기에 내 아이만큼은 더욱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다.
“너희를 허락하지만, 인정한 건 아니야. 둘이 좋은 부모가 될 자격이 생기면 그때 나한테서 독립해도 좋아.”
사실 혜미는 이미 그들이 좋은 부모가 될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아이가 생겼지만,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그 자체로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효원이의 엄마이기 때문에 앞으로 네가 어떤 아이인지 지켜볼 거야. 하지만 내 딸을 믿으니까 너도 믿어볼게.”
동하를 보는 혜미의 표정은 웃고 있었다. 혜미가 둘의 손을 꼭 잡은 채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 힘든 일이 많을지도 몰라.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 거고, 나보다 아이를 더 챙겨야 할 때가 많을 거야.”
혜미가 자신이 잡고 있던 효원의 손을 동하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니 이 손 절대 놓지 말어. 나는 혼자여서 악착같이 버텨냈지만, 너희한테는 서로가 있잖아.”
그런 혜미를 보며 다시 눈물샘이 터져버린 효원이었다. 동하가 재빨리 서점에서 사 온 책을 꺼내 보였다.
“저, 그리고 이거…. 이것만 보면 임신에 대해서 모든 걸 알 수 있대요.”
동하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는 두 모녀였다.
*
[당신의 앞으로 책 선물이 도착하였습니다.
서점 앞 빨간 우체통에 보관하고 있으니 편하신 시간에 찾으러 와주세요.
자물쇠의 비밀번호는 핸드폰 뒤 네 자리입니다. 약도는 지도로 첨부해 드리겠습니다.]
혜미에게 문자를 보내고 난 여름이 서점을 마감하기 시작했다. 낮에 서점에 온 동하가 책을 사가며 마음서가를 신청한 까닭이었다. 이 순간 석호가 함께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을 전하고 싶은 사람에게 말 대신 책을 선물하는 것. 자신이 원하던 건 이런 거라며, 보여주고 싶었는데….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카운터를 정리하는 여름의 귓가에 계속해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저장돼있지 않은 번호, 여름은 더 이상 받지 않는 번호였다.
석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때는 모든 전화를 다 받았던 여름이었다. 물론 그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오히려 인생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불청객이었을 뿐. 아니나 다를까 진동이 끊어지자마자 한 통의 문자가 날아왔다.
[이모님이 전화가 너무 안된다고 연락 좀 달라고 하세요.]
잠시 고민하던 여름이 이내 수신차단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