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넷_나 홀로 김장하기
다음 주에 김장을 하실 것 같아. 아무래도 이번엔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뭐? 그럼 우리 밭 배추는?
남들보다 1~2주가량 늦게 심은 주말농장 배추는 아직 채 알이 차지 않은 상태였다. 다음 주에 수확을 하면 조금 더 실한 배추를 뽑을 수 있다 생각했는데, 시댁에 가야 해서 우리 밭에 올 수 없다는 거였다.
여름철 수확이 끝나고, 노는 땅에 김장용 무와 배추를 심겠다 결정했을 때부터 올해는 우리 가족 셋이 모여 소소하게 김장을 해 보리라 생각했었다. 마흔 전까지만 해도 부모님과 시댁에서 김치를 얻어먹는 게 불편하지 않았는데, 부모님들도 한 살 한 살 나이가 드시고 나도 마흔을 넘기고 보니 슬슬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안 그래도 힘든 김장에 우리 몫까지 더하고 싶지 않았고, 적어도 김치는 담글 줄 아는 어른이고 싶었다.
김장 독립을 해 볼 생각이었지만, 아직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 시간을 따져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더 늦어지면 기껏 키운 배추가 얼거나, 병이 들까 봐 걱정이 되었다. 좀 아쉽더라도 당장 수확하기로.
김장할만한 배추를 골라 뽑으니 15포기였다. 내 허벅지보다 굵어진 무 열 개와, 배추를 트렁크에 싣고 보니 배 한가득 고기를 싣고 돌아오는 어부가 느꼈을 만선의 기쁨이 이런 걸까 싶었다.
배추를 집에 실어 나른 후, 부랴 부랴 장보기에 나섰다. 소금이 젤 중요하다고 해서 질 좋아 보이는 '비싼' 천일염을 사고, 쪽파, 생강, 마늘, 멸치 액젓, 김장 봉투를 구매했다. 시어머니께서 보내주신 고춧가루가 두 근 있었지만 모자랄까 걱정이 되어 한 근을 더 구입했다. 난생처음 내 돈을 주고 고춧가루를 사던 순간, 가격 때문에 한 번 두 번 세 번 망설인 건 안 비밀. 이렇게나 비쌀 줄 몰랐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김장에 돌입했다. 가장 먼저, 배추 절이기! 한 포기 이상의 배추를 절여 보는 것도 난생처음이었다. 소금물 비율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아서 지식 창에 검색해 보았다. 그리곤 물: 소금의 비율을 10: 1로 결정했다.
큰 대야에 물과 소금을 넣어 소금물을 만들고 반으로 가른 배추를 몇 번 담갔다 뺐다. 그런 다음 김장용 비닐봉지에 배추를 차곡차곡 쌓고, 남은 소금물을 붓고 비닐 입구를 꽁꽁 묶었다.
배추가 잘 절여지도록, 2~3시간마다 살살 굴려가며 배추의 위치를 바꾸어 주었다. 그러다가 그만 비닐에 구멍을 뽕~ 내고 말았다! 대참사가 일어날 뻔했지만, 다행히 숨이 죽은 배추들이 큰 대야 안에 안성맞춤으로 들어가 위기를 모면했다.
12시간 후, 배추를 씻었다. 그런데, 절여진 배추가 짜도 너무 짜다! 어쩌지?
물을 좀 빼고 나서 다시 절여진 배추를 먹어 봤는데, 여전히 너무 짰다. 특단의 조치로 나는 맹물에 배추를 다시 담가놓기로 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이래도 되나 싶어 다시 배추를 건지기 시작했는데, 숨이 죽었던 배추가 다시 살아나 뻣뻣했다. 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걸 어쩌지?
우선 물이 빠지도록 그냥 두고, 양념을 제조했다. 새벽에 미리 만들어 놓은 황태 육수, 찹쌀풀에 곁들일 무, 양파, 배, 파를 다듬고, 마늘과 생강을 손질했다.
재료 준비가 끝났다. 이제 황금비율로 배합하기면 하면 되는데, 그게 또 문제였다. 15포기에 알맞은 양념의 비율을 찾지 못했다. 감대로 해 봐? '김장도 과학'이라는데, 나는 용감하게 첫 김장에서 감대로 양념을 배합했다. 고춧가루 두 근을 넣고, 생강을 열 쪽쯤 갈아 넣고, 마늘을 종이컵으로 열 컵, 배 두 개, 잔파 한 단, 무 두 개, 양파 두 개를 썰어 넣었다. 새우젓 세 컵, 멸치액젓 세 컵을 넣고 고루 버무렸다.
망했다.
생강 맛이 너무 강했다. 시어머니께서 주신 고춧가루는 매워도 너무 매운 고춧가루였고, 생강이 많이 들어가 양념은 맵고 알싸하고 고통스러운 맛이었다.
신화당을 좀 넣어봐
대략 망조가 보이고서야 나는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sos를 했다. 혼자 보기 좋게 성공해 보려다가 큰코다친 거다.
그런 게 우리 집에 있을 리 없지...
그럼 하는 수 없다. 고춧가루랑 육수를 더 넣고 새로 양념을 만들어.
나는 그 많은 재료들을 조금씩 더 배합해 가며 양념을 다시 버무렸다. 단맛을 내는 배를 더 갈아 넣고, 육수를 두 국자쯤 더 넣고, 멸치 액젓을 두세 국자 더 넣었을 때 맛이 났다!
살렸다!
절여진 배추가 짜다고 액젓을 적게 넣은 게 가장 큰 문제였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맘에 드는 양념을 만들고 나니 일이 다 끝난 거 같았다.
이제 절여진 배추에 양념 옷을 입힐 차례다. 뻣뻣하게 살아난 배추를 이제와 어쩔 수 없었다. 이것도 다 경험이지 경험. 다음엔 맹물에 입수시키지 말자.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만큼 더 예쁘고 꼼꼼하게 양념 옷을 입히기로 했다.
일요일 아침 수확한 배추를 절이고, 갖가지 부재료를 다듬고, 양념을 만들고, 배추에 양념 옷을 입히고 나니 월요일 저녁이었다. 김장은 최소한 1박 2일의 고된 노동이 집약된 결정체인 셈이다.
마흔넷이 되어 처음, 혼자 해 본 김장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비싼 고춧가루와 재료비에 놀랐고, 강도 높은 노동에 또 한 번 놀랐으며, 김장 후 치워야 할 갖가지 것들의 잔해들과, 설거지해야 할 것들에 한숨이 절로 나는 경험이었다.
꼭꼭 채운 김치통을 냉장고에 채워 넣었다. 뿌듯했다. 이게 뭐라고. 1박 2일의 그 모든 고생들이 완성된 김치가 담겨있는 김치통 앞에서 싹 날아갔다.
가장 중요한 건 맛일 텐데, 절였으나 절여지길 거부한 배추 덕분에 씹는 맛이 살아있었다. 그래도 알맞은 양념 덕분에 지인들에게 나눠 줄 정도의, 먹을만한 맛은 되었고.
비록 절반의 성공이지만 내 손으로 직접 키운 무농약 배추로, 내가 직접 담근 김치 아니겠는가? 맛보단 질이라고, 건강한 김장을 했다고, 나 홀로 첫 김장을 완성한 것에 의미를 두자고, 뻣뻣한 배추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었다.
저녁부터는 찜질기와 한 몸이 되어 다음날까지 일어나질 못했다. 마흔넷의 첫 김장 독립은 절반의 성공과 함께 지독한 몸살을 남기고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