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이트 아울 Sep 09. 2024

주차 차단봉

나약해서 슬퍼진, 그럼에도 결코 틀린 선택은 아니었다고 믿고 싶은

작은 배려마저도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히는
세상의 차가움
어디에 발을 붙이고 있든 이 하늘 아래 주자 문제가 없는 땅은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기갑부대 1개 사단도 머물 수 있을 것 같은 한적한 농촌 마을에서조차 주차를 하면 득달같이 달려와서 다른 곳에 주차하라는 누군가 나타난다. 그 자리가 자기 땅인지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나는 그럴 권리가 있다고 여겨지는 누군가가 어디에나 있을 뿐이다.
물론 주차 자리 텃세가 횡횡하는 하늘 아래는 문자 그대로 아무 데나 주차할 수 있는 천부주차권을 부여받은 것인 양, 교통이나 다른 사람의 통행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자유인도 함께 공존하고 있다. 그런 자유인들에게는 지구가 커다란 무인도이고, 그들의 사전엔 '주차금지'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행히도 세상에는 법과 원칙(누군가 높은 곳에서 자기들의 편의대로 가져다 쓰는 그런 말이 아닌)이 존재하고, 그런 원칙아래 주차금지 구역이 있고, 그런 구역에 주차할 수 없도록 물리적으로 주차 차단봉을 설치해 놓기도 한다. 차단봉은 무척이나 부드럽고 조금만 힘을 주면 휘어졌는데 이는 혹시라도 차단봉에 부딪치는 차량에 흠집이 나지 않도록 배려해 준 마음의 표현이자 배려라고 생각되어 두 손가락 사이로 조금의 따뜻함이 스며들었다.
그런데, 오늘 내 손을 스쳐간 주차 차단봉은 상처 입은 차단봉이었다. 분명 이 자리에 주차하면 다른 차들의 통행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부득이 설치한 차단봉은 언제나처럼 천부주차권을 휘두른 누군가에 의해 쓰러져 있었다. 만약 차단봉에 입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저 정도로 심하게 상처 입었다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최후의 순간에 차단봉에게 유언을 남길 행운이 있었다면 이런 말을 했을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전해졌다.
"이번 생에는 제가 나약하고 부드럽게 태어나서 이런 꼴을 당했습니다. 다음 생에는 스치기만 해도 모든 것을 갈가리 찢어 놓을 수 있는 강철톱이 달린 차단봉으로 태어나게 해 주세요"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분명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상대방을 배려해서 조금은 부드럽게 덜 상처받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고 싶었음에도 상대방은 그런 작지만 따뜻한 마음씀씀이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욕심만 채우면서 그 배려를 상처로 돌려주는 일. 그런 순간을 지나고 나면 세상에 대한 환멸과 함께 다른 사람에게 상냥하게 대하는 일이 하찮고 가치 없는 일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배려와 따뜻함이라는 단어를 잊어간다.
이해할 수 있다. 공감도 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떨쳐버릴 수 없다. 우리는 이제까지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며 이기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그럴듯한 이유로 변명하며 합리화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봐 왔던가. 그런 사람이 과연 앞에서 함부로 차단봉을 대해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내 삶을 그렇게 색칠하고 싶었던 것일까.
답은 없다. 나도 당신만큼이나 삶의 태도에 대한 정답을 원하지만 도무지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아는 것도 있다. 나도 당신도 위에서 예시한 삶의 모습 가운데 어떤 삶을 선택할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그게 모두 오답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을 의지를 품을 수 있다는 것을.
이전 08화 제습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