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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이트 아울 Sep 06. 2024

 제습제

세상에서 가장 큰 제습제가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느낄때

 두 손가락으로 들 수 없을 만큼 무거워졌을 때
터널의 출구를 보았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긴긴 여름밤도 저물어 간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영원할 것 같은 추위에 몸이 떨리고 그 추위를 이겨내기 위한 난방비 고민으로 마음까지 떨리는 시기가 오겠지만 여하튼 지금, 이 순간에는 여름이 지나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여름이 되면 습기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태풍 같은 소나기가 스치듯 지나가는 날이 많았던 올해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래서 플라스틱 통에 담긴 제습제를 방 곳곳에 배치해 뒀더니 여름이 끝나는 그 순간, 그 제습제들은 일제히 떠날 준비를 마쳤다고 합창하듯 통 안에 가득 찬 물을 있는 힘껏 출렁였다.
분명 제습제를 설치할 당시에 젓가락질하듯 두 손가락으로도 가볍게 들 수 있을 것처럼 '가볍다'라는 느낌이 스쳐갔던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느 무덥고 습한 계절을 지난 제습제는 도저히 두 손가락으로는 들어올 릴 수 없었다. 분명 제습제 속에 있는 것은 물과 어떤 화학물질의 결합체겠지만 실은 그 안에는 여름이라는 계절, 그 시간의 일부가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 이상 조금의 습기도 더 품을 수 없을 때, 그렇게 나와 제습제는 계절을 느끼며 헤어져야만 했다. 아무리 제습제가 그 자리를 지키고 싶고, 더 많은 시간을 품고 싶어도 더 이상 제습제 내부에는 그럴 공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보내는 냉대를, 무관심을, 무신경함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인내라는 미덕으로, 중간에 그만두면 아니한 것만 못하다는 옛 속담으로 애써 견디며 그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품어보려고 애썼지만 무한의 시간 동안 제습제를 한 곳에 둔다고 해도 내 방안에 태평양이 생겨나지는 않는 것처럼 결국 사람의 감정은 이미 다 차버린 제습제처럼 적정선 이상은 담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나는 그 사람을 떠나갔다. 나약한 사람, 못난 사람,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자학하면서 결국 다른 누군가를 찾아 헤맨다.
하지만 이런 흔한 실패담에서 벗어나 작게나마 정신승리를 해보자. 만약 제습제가 무한히 큰 통으로 만들어져 세상 어딘가, 습기가 아주 많은 곳에 놓인다면 그 제습제는 영원히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크키가 작은 제습제는 자기가 채울 수 있을 만큼 습기를 채우고 자의든 타의든 그곳에서 벗어나 다른 곳을 향할 수 있다, 아니 향하게 된다. 그 다른 곳이 천국인지 지옥인지는 모른다. 다만 지금과 달라질 뿐이다. 역설적으로 '다른 삶'이란 지금의 삶을 견딜 수 없는 부족함때문에 생겨난다. 만약 모든 것이 충분하거나 혹은 모든 고통과 역경을 견딜 수 있다면 지금 있는 그 장소를 떠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조금은 기뻐해도 좋지 않을까. 나의 부족함이야 말로 내 삶을 다른 곳으로 이끌 수 있는 결정적인 한 조각이라는 것을, 간신히 떠날 수 있을 정도로 그 사람을 좋아했기 때문에 끝도 없이 일방적으로 내 마음을 그 사람에게 강요하는 나쁜 사람은 되지 않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떠나보내지 못했던 어떤 사람들이 기어이 범죄까지 저지르지만 나는 부족함이라는 단점 때문에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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