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라고 느낀 순간에도 결코 혼자는 아니었던
작고 연약했지만 다행히 외로움에 꺾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혼자가 아닌 상태로
지나가지 않을 것만 같은 아픔의 순간이 있다. '이런 기회를 다시 얻을 수 있을까', '이런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런 행복을 다시 누릴 수 있을까'와 같은 말로 이미 시들어 과거라는 시들어버린 꽃을 응시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고통은 지금, 여기, 현실로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 순간들은 언젠가 지나가서 그저 삶의 흔적으로만 남을 뿐이라는 사실을, 단지 그렇게 되는 데는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런 깊고 어두운 터널을 한 발짝식 나가며 어둠의 공포와 무게를 견뎌내는 것이 내 운명이라는 것을.
예전에는 위와 같은 말이 진리인 줄 알았다. 이 세상에 사는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 각자의 고민과 고통을 혼자 짊어지며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런 부분도 있다. 아무리 전하고 싶어도 전해지지 않은 고통과 괴로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단 하나의 질문이 있다.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은 어디까지일까?"
아침 운동으로 달리기를 하던 트랙 옆 잔디 사이로 하얀빛이 피어났다. 종류는 모르겠지만 버섯인 것은 분명한데 모두가 푸르른 삶을 지향하는 것 같은 잔디 한가운데서 혼자 서 있는 단 한줄기 새하얀 버섯은 대견해 보였지만 무척이나 외로워 보였다. 손가락 너머로 전해지는 부드러움과 별개로 아마 내가 그 버섯이었다면 그랬을 것 같다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같은 트랙을 몇 번이고 돌면서 자세히 살펴보니 그 버섯은 혼자가 아니었다. 트랙 인근 잔디 사이 곳곳에서는 도저히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른 버섯들이 듬성듬성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다만 나를 처음 반겨줬던 버섯 근처에는 다른 버섯이 없었을 뿐, 그 자리를 벗어나 더 멀리서 다른 방향으로 살펴봤을 때, 한송이의 버섯은 버섯 군락이라고 해도 될 만큼 넓은 곳에 펼쳐져 있었다.
어쩌면 그 많은 버섯들처럼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와 고통을 오롯이 혼자 견디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데 있다고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종교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그럼 오늘부터 우리 모두 믿음을 가져보자. 다행히도 이교도의 목을 배거나 설문란에 있는 종교 영역에 기재할 필요가 없는 믿음이다. 교리는 단 하나다.
"어쩌면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와 같은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 힘들 땐 다른 장소에서 다른 방향을 보면서 이번 고통도 견뎌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