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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이트 아울 Aug 30. 2024

반납함

이제는 시각으로도 촉감으로도 기억나지 않는

한때는 닳도록 만졌지만 이제는 그리움만 남은


아주 오래전 비디오와 책을 대여해서 보던 시대가 있었다. 분명 청동기 시대를 마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쯤까지였던 것 같은데 눈 한번 깜빡했더니 비디오 대여점은 비디오 CD, 블루레이를 거쳐 스트리밍으로 천하통일 되었면서 최후를 맞이했고 책 대여점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가 권당 1000원씩 받고 재고정리 후 순식간에 멸망해 버렸다.
그런 시대의 변화와 함께 많은 것들이 사라져 간 것은 무수한 자영업자들뿐만이 아니었다. 그 가게 하나하나마다 가지고 있던, 가게 입구에서 24시간 365일 반환의 손길을 기다리던 반납함은 이제 아무 곳에서도 볼 수 없다. 그나마 비슷한 모양은 가진 헌 옷 수거함이 동네 어딘가에서 간간이 보일 뿐 내가 기억하는 반납함은 무심히 지나다가 우연히 마주칠 뿐이다.
그렇게 우연히 마주친 반납함을 한번 만져봤더니 "나 아직 죽지 않았어"라고 외치는 것 같은 단단함과 강인함이 느껴졌다.  물론 ATM과 달리 비디오나 도서 반납함을 강제로 뜯어서 내용물을 가져갔다는 뉴스는 거의 보지 못했던 이유는 내용물이 복불복인 대여함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겠지만 강철의 대여함은 페인트칠의 가호 속에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대여함의 최대 강적은 범죄자들의 습격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였고 그 문제만큼은 강인함과 단단함으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내 삶에서 대여함은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왕가위 감독의 2000년 작 '화양연화'에는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로써 좋았던 그 무언가가 희미해졌기 때문에 느낄 수밖에 없는 작은 탄식을 표현하고 있다. 한때는 매일 같이 학교를 마치고 들여서 신간 만화책을 빌려봤던 책 대여점, 매주 주말마다 새로 나온 비디오테이프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들렸던 비디오 대여점은 내 일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간신히 그리움만 기억하는 그 많은 대여점들, 그리고 다른 모든 추억들은 지금 어디로 가버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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