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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이트 아울 Sep 20. 2024

물티슈

금가루도 눈에 들어가며 아픈 건 마찬가지라던데

그것은 새하얗고 부드러웠지만 유달리 믿음직스러웠다


현재라는 공간에는 과거에는 없던 수많은 물건들이 가득하디. 백 년 전 사람들은 로켓이라는 것을 본 적도 없었을 것이며 오십 년 전 사람들은 인터넷 세상을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정작 요즘 나에게 가장 큰 존재감을 나타내는 '현재의 것'은 바로 물티슈이다.
손으로 만질 때마다 느끼는 물티슈의 촉감은 부드럽고 촉촉했다. 하지만 그런 물리적인 감각을 넘어 물티슈에는  최소한의 노력만으로도 눈앞에 있든 더러움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서려있다. 우리의 삶에서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될 거야"라고 외칠 수 있는 순간이 거의 없다는 현실과 비교하면 "물티슈로 닦으면 좀 괜찮을 거야"라고 외치는 순간이 더 많고 심지어 저렴해서 부담도 없다는 사실에 안도감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하지만 그런 유용한 도구조차도 충분하지 않은 순간이 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물티슈가 아니라 손수건 혹은 그냥 티슈로 닦아야 하는 물질을 물티슈로 문지른 탓에 더욱 보기 싫은 모습으로 얼룩이 지고 심지어 더 크게 번지는 일이 바로 그런 순간이다. 물론 그 사단은 물티슈의 잘못이 아니다. 음주운전으로 사람이 죽고 다치는 것이 자동차의 잘못이 아니고 누군가 코인으로 돈을 잃는 것이 계좌이체 시스템의 과실이 아닌 것처럼 무언가를 이용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는 오롯이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책임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세상 모든 일에서 '적재적소'라는 말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비단 물건의 사용뿐만이 아니다. 내 딴에는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신경 써서 연락도 하고 필요하다고 싶은 순간에 도움을 주려고 하는 그 모든 행동들이 정작 상대방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부담스럽고 조금 더 나아가 스토킹처럼 느껴지기도 만든 것은 내가 '적재적소'를 찾지 못하고 원치 않는 사람에게 원치 않는 호의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정말 슬프게도 내 머릿속에는 지극정성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해피 엔딩을 기대하고 있지만, 상대방의 머릿속에는 제발 좀 끝났으면 하는 부담과 짜증의 연속인 재난물 혹은 호러물이 끝도 없이 상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가끔은 먼저 연락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그 사람의 머릿속이 나와 같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상상 속으로나마 오른손이 없다고 생각하고 집어 들려던 전화기를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최소한 좋아하는 마음을 담아 그 사람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방법으로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것이 비록 로맨틱 코미디의 해피 앤딩에 도달하는 길은 아니라고 하더라고, 적어도 그런 마음이라도 지켜낸다면 최악은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모든 계절이 지나면 다음번에는 누군가의 마음에서 적재적소로 자리 잡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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