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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Dec 21. 2023

짜증과 답답함, 지겨움을 넘어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피아노 연습 일지


올해 7월 18일부터 <서른 즈음에>를 연습했으니 벌써 5개월째다. 솔직히 징하다. 곡을 처음 연습하기 시작했을 때의 설렘은 거의 없다. 지금은 손가락 힘을 빼고, 조금 더 부드럽게, 감정을 잡고 치기 위해서 마지막 디테일을 가다듬고 있는 시기랄까. 아니, 솔직히 지금도 계속 조금씩 미스 터치가 나서 곡 처음부터 끝까지 미스 터치가 안 나고 무난하게 치는 게 1차 목표다. 


5개월 동안 피아노를 연습한 시간에 알바로 돈을 벌었으면(최저시급 만원 잡고 하루 두 시간) 2만 원 * 150일 = 300만 원은 벌었겠다. 그래서 가끔 속이 쓰리기도 하다. 그래도 300만 원 이상의 가치를 위해서 나는 이 짓을 계속하고 있다고 믿는다. 


연습을 한다고 실력이 계속 (눈에 띄게, 혹은 스스로 느끼기에) 우상향 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하향 곡선을 그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빼먹지 않고 연습을 하는데도 어느 날은 손가락 번호가 헷갈리기도 하고, 어느 날은 피아노 건반이 무척 낯설게 느껴지며 과연 내 손가락이 저 건반을 맞출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연습할수록 손가락이 뻣뻣해지는 것 같을 땐 '무슨 퇴화병이라도 걸린 건가' 하며 마음이 무거워지고 머리도 아파온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억지로 참아야 한다는, 그런 유의 인내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하기 싫으면 포기하면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장기적인 비전이 있고, 현재의 답답함과 지겨움 뒤에 올 미래의 가치와 그에 대한 믿음에 대해 말하고 싶다.


요즘, 독학으로 건축을 배워 유명한 건축가가 된 안도 다다오의 책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읽고 있다. 그의 책을 읽어 보면 그가 단순히 돈이나 출세를 위해서 건축을 하는 게 아니고, 분명한 건축 철학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건축주나 허가 관련 공무원에게 자기의 철학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모습이라든지, 시대와 사람과 자연까지 생각하는 자세를 보면 그렇다. 


어떤 사람에게는 건축이 재건축 아파트를 통해 부유해지는 기회로만 존재할 것이고, 자연을 훼손하는 인공물로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도 다다오에게 건축은 남다른 '가치'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김춘수의 시구처럼 결국 가치와 의미는 부여하는 쪽에서 결정한다. 우리가 무심코 버리는 종이로 무한한 종이비행기의 세계에 사는 사람도 있지 않나.


생물이 증식하듯 단계적, 지속적으로 성장해 온 나오시마. 그곳에 20년 남짓 관여해 온 내가 지금 새삼스레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긴 세월에 걸쳐 만들면서 생각하는, 혹은 사용하면서 생각하는 지속적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생겨나는 힘이란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p.252


"지속적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생겨나는 힘" 너무 공감되는 말이다!


세상은 내가 가치를 추구할 때 그 이상적인 모습, 결실을 쉽사리 내어주지는 않는 것 같다. 일교차가 심한 지역에서 사과가 단맛을 축적하고 배추가 (알이) 더 굵고 단단해지듯이 재능의 성장에도 터널 구간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터널 구간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 터널을 지나면, 답답함과 무료함과 짜증스러움을 넘어서면 분명히 다른 세계가 있다. 그 너머의 다른 세계를 꼭 경험하겠다는 비전이 있는 사람만이 그 마의 구간을 묵묵히 견딜 수 있다. 내가 <서른 즈음에>를 연습하며 피아노와 씨름했던 5개월은 어떤 식으로든 음악 생활에 도움을 줄 것이다. 손가락 트레이닝이든, 코드 보이싱이든, 리듬이든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한 과정으로서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믿는다.


하루에 3만 원씩 벌면 한 달이면 90만 원을 벌지만, 하루 만에 90만 원을 벌기란 쉽지 않다. 재능도 마찬가지다. 결국엔 작은 재능의 조각들을 무시하지 않고, 하찮게 여기지 않고 모으는 자가 결실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재능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번뜩이는 영감 같은 게 아니다. 재능은 공기처럼 늘 우리 곁에 존재하지만, 그것을 자각하고 모으고 제련하는 자만이 빛을 발할 수 있다. 


답답하면 쉬어 갈 수 있다. 이것을 기억하자. 도태될까 두려워하지 마라. 재능의 성장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자 싸움이지 남을 상대하는 게 아니다. 남과 비교해서 도태된다는 생각은 어리석다. 재능은 경쟁이 아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쉬면 곤란하다. 근력운동이든, 유산소운동이든 3일 연속 안 하고 나면 4일째는 우선 하기가 싫어지고, 몸도 더 무거워진다. 재능도 똑같다. 행동이 행동을 부른다.


산을 탈 때, 정상까지 가지 않더라도 멋진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어느 지점까지는 올라야 한다. 산이 전망을 보여주는 지점들이 몇 군데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등산을 하는 와중에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더라도, 하늘이 안 보이더라도 숲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숲속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숲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머지않아 하늘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여러분은 숲속에 있고, 숲을 통과했기 때문에 산중턱에 서서 산 아래와 산 위의 풍광을 바라보며 "우와!" 하는 감탄사를 연발할 수 있게 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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