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는, 아니 최근까지도 경제적 자유를 이루고 나야 진정한 자유가 온다고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경제적 자유를 이루기가 어디 쉬운가? 돈을 벌고 모으는 데 그다지 소질이 없는 나에게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전 같으면 자기계발서를 열심히 보고 실천력이 부족한 한심한 나를 다그치며 고군분투했겠지만, 이젠 그럴 기력도 없을뿐더러 그게 정답도 아닌 것 같다.
"돈 얼마 모아놨어?", "그 나이 먹도록 뭐 했어?" 하는 질문에 대답이 궁해져도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거나 자존심이 상해 씩씩거리지 않고 "뭐 하긴, 먹고 똥 쌌지 하하" 하고 편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자유 아닐까?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성공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데, 현재의 내 모습만 보고 무시하는 상대방에게 분노하거나 서운해하는 흔한 우리들의 모습. 주어진 현재와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모두 인생의 한 부분이기에 초라하거나 보잘것없는 모습을 굳이 부정하며 좋은 모습, 성공한 모습만 보이려 애쓸 필요는 없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모습이 아름답고, 꾸밈없이 뛰어노는 강아지의 모습이 아름답듯 우리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사랑스러울 것이다. 진정한 내면의 자아가 보기에, 진솔한 친구가 보기에 말이다.
사람들은 안전과 안정을 원하지만, 안전과 안정이 곧 자유는 아니다. 오히려 안전과 안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진정한 자유다. 그렇다면 자유는 불안한 것인가? 그렇다. 자유는 불안하고 불안정한 면이 있다. 자유는 비정규직 같고, 일용직 노동자 같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면 그 희열과 해방감은 정규직의 안전과 안정이 주는 가짜 안락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정규직의 자유는 긴 목줄로 구속된 개의 자유와 같다. 먹이와 잠자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축과 다를 바 없다. 현실의 성실한 노동자를 비난하거나 비하하는 건 절대 아니다. 자유의 속성을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래서 자유를 얻으려면 일단 먼저 내려놓아야 한다. 손이 자유로우려면 쥔 것을 먼저 놓아야 한다. 사람들의 시선, 사회적 인식과 지위, 나의 고정관념, 고집과 아집, 잘못된 신념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다른 각도의 다른 시선이 필요하다. 여태껏 내 삶을 바라봤던 스스로의 시선을 벗어난 다른 시선. 여행을 많이 다니면 안목이 넓어지듯이 자신의 삶을 여행하듯, 관조하는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능력 있는 아빠(엄마), 자상한 남편(아내), 효성 깊은 자식, 친절하고 상냥한 직장인... 이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보자. 물론 타인에게 피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태초의 자연인으로 돌아가서 온전한 자연인이 되어 보자. "나는 그냥 나입니다. 나는 이렇게 생겨먹은 나입니다. 파란 하늘을 보고 한없이, 하릴없이 몇 시간이고 누워 멍 때릴 수 있는 나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자유는 마음먹기에 따라 아주 가까이에 있기도 하고, 한없이 멀리 있기도 한 것 같다. 성취욕을 버리면 지금 바로 누릴 수도 있지만, 완벽한 나를 상정해 놓으면 한없이 멀리 있고, 고지에 도달해도 곧 모래성이 돼 버린다.
나이가 들어서 외모가 초라해지고, 건강이 약해진 것은 반갑지 않지만 젊었을 때의 그 아등바등한 삶에서 한 발짝 물러설 수 있는 용기와 여유가 생긴 것은 좋은 변화다. 타인의 인정과 그릇된 자기만족을 위해 달리기만 하던 젊은 시절에는 볼 수 없었던 삶의 숨은 모습 - 자유의 여지 - 을 볼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자유를 깨달았다고, 자유를 쟁취했다고 감히 말할 순 없다. 여전히 욕망에 좌우되고,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하는 범인이다. 그래도 자유에 어떻게 한 발짝씩 다가설 수 있는지, 본연의 순수한 삶으로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지 조금씩 깨달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고 다행스럽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아도
나는 스스로 꽃입니다.
내 인생의 절정은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의 공기와 대지와 하늘과 바다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심 없이 마음껏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심장이 뛰고 있는 당신
살아있는 당신의 권리이자 축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