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내 이마 넓어?

by 바나나 슈즈
KakaoTalk_20250430_134314828.jpg 얼굴이 하얗게 되는 선크림과 입술이 빨갛게 되는 립밤이 놓인 아이의 책상


어느 날, 딸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열자마자 물었다.

"엄마, 내 이마 넓어?"

평소와 다른 목소리 톤에서 무언가를 감지했다. 밝고 경쾌하던 그 목소리에 미세한 균열이 생긴 것 같았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상처받은 흔적이 묻어있었다. 가방을 어깨에 멘 채로 딸 아이는 현관에 놓인 운동화를 정리하는 척하며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친구가 내 이마 넓대. 쉬는 시간에 다른 애들도 있는데 손가락으로 재가면서 말해서 속상했어. 은채이랑 아린이는 웃었어."


열두 살 딸의 얼굴에는 나도 모르는 새로운 표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을 인식하기 시작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이전까지 그녀의 세계는 단순했다. 먹고, 자고, 놀고, 웃고, 가끔 울고. 하지만 이제 그 세계에 '보여지는 나'라는 새로운 차원이 등장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아이는 하루아침에 관객과 배우를 동시에 맡게 되었다.




사실 아이의 이마는 결코 넓지 않다. 그저 평범한, 열두 살 아이의 이마다. 다만 인류 역사상 가장 정확한 측정 도구인 열한 살 친구의 손가락이 그렇게 판정했으니, 세상의 모든 자와 줄자는 이제 무용지물이 되었다.


며칠 뒤, 샤워를 마친 딸이 욕실에서 나왔다. 머리카락 끝에서는 아직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고, 바디 로션 냄새가 나는 분홍색 타월을 어깨에 두른 채였다. 아이는 거실 벽에 걸린 전신 거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순간이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아이의 눈이 자신의 얼굴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물었다.

"엄마, 난 왜 쌍꺼풀이 없어?"

이 질문이 던져진 후, 나도 모르게 입이 다물어졌다. 가족사진이 놓인 선반 위의 시계만이 똑딱거리며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알렸다. 나는 그 질문의 무게를 감지하며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그 날 저녁, 딸아이 방에서 태블릿 화면의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문을 살짝 열어보니 그리고는 유튜브로 쌍꺼풀 수술 영상을 찾아보는 아이. "눈두덩이 붓기는 일주일, 멍은 보통 2주 정도 간다고 보시면 돼요..." 영상 속 의사의 설명이 흘러나왔다. 아직 초등학생인 딸이 성형 수술 영상을 본다는 사실이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시대의 동화일 것이다. 백설공주는 더 이상 거울에게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 누구냐'고 묻지 않는다. 대신 '쌍꺼풀 수술은 얼마나 아프냐'고 묻는다.


미처 준비되지 않은 질문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주말 아침, 함께 장을 보러 가던 차 안에서 아이가 불쑥 물었다.

"엄마, 인싸옷은 어디서 살 수 있어?"

백미러로 보이는 아이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녀에게는 생존이 달린 문제처럼 보였다.

"인싸...옷?"

"어, 인싸들이 입는 예쁜 옷 말이야. 우리 반 하린이 늘 그런 옷 입고 와. 어제는 짧은 후드티에 통 넓은 바지 입고 왔는데, 다들 예쁘대."

열두 살 딸의 사전에 이미 '인싸'와 '아웃사이더'의 구분이 명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구분의 기준에는 외모와 옷차림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사회심리학자 찰스 쿨리는 이를 '거울 자아(looking-glass self)' 개념으로 설명했다. 우리의 자아는 타인이 우리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상상, 그리고 그 판단에 대한 우리의 감정적 반응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지금 내 딸은 지금 자신을 향한 또래들의 판단을 상상하고, 그것에 맞춰 자신을 재구성하려는 초기 단계에 있다.

한편으로는 생각한다. 우리가 어릴 적에도 '노랑머리'니 '날라리'니 하는 구분이 있었지 않았던가. 다만 그때는 같은 것을 다른 이름으로 불렀을 뿐. 인류의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현상에 새로운 이름표를 붙이며 돌고 도는 것인지도 모른다. 딸에게 이 철학적 통찰을 들려주고 싶었지만, 그녀의 눈에 비친 절박함을 보며 그저 브랜드 이름 몇 개를 알려주는 것으로 타협했다.




아이들은 이 시기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고민한다. 에릭슨이 말한 '정체성 대 역할 혼란' 단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또래 집단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소속감,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자신의 본질보다 중요해지는 순간들. 심리학자 매슬로우가 말했듯 소속의 욕구는 인간의 기본적 필요다. 어느 유명한 수염 난 학자 프로이트는 이런 시기를 잠복기에서 벗어나 성적 정체성이 재활성화되는 중요한 단계라고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학문적 설명이 당장 내 딸의 속상함을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거울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새로 산 블라우스가 체형을 어떻게 보이게 하는지, 머리는 묶는 게 나을지 푸는 게 나을지, 스카프는 할지 말지, 바지는 어떤 색을 입을지, 신발까지... 고민했던 나다. 어른이 된 나는 과연 이러한 외적 평가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 출근할 때 옷차림을 의식하고, SNS에 사진을 올리기 전 필터를 고르는 행동은 어쩌면 열두 살 딸의 고민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것이다.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의 '사회적 비교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면서 자아를 정의한다. 아마 우리는 평생 '인싸'가 되기 위해 애쓰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인싸'의 기준이 나이에 따라 조금씩 바뀔 뿐.




주말 점심을 준비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파트 단지의 평범한 풍경, 늘 보던 그 모습인데 오늘따라 달리 보인다. 우리의 자아는 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통해 형성된다고 한다. 그저 내 눈에 비친 나가 아니라, 타인의 눈에 비친 내가 다시 내 눈에 비치는 복잡한 반사 과정을, 사회학자 찰스 쿨리는 '거울 자아'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그 거울은 종종 놀이공원의 그것처럼 왜곡되어 있다. 친구의 무심한 한마디, 미디어가 주입하는 획일화된 미의 기준, 인스타그램의 완벽해 보이는 타인의 삶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자신을 바라보는 렌즈를 형성한다. 마치 현대판 플라톤의 동굴처럼, 우리는 어쩌면 평생 왜곡된 그림자를 실체로 믿으며 살아가는지도.


저녁 식사 후, 딸과 함께 소파에 앉아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성형 전후 사진을 비교하는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딸의 시선이 화면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보며 질문했다.

"난나는 얼굴의 어떤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어?"

잠시 생각하던 아이가 대답했다.

"음... 웃을 때 눈이 반달처럼 되는 거?"

그 순간 아이의 얼굴에 번진 미소는 어떤 성형수술도, 어떤 인싸 옷도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좋아하는 순간, 아이는 가장 빛났다.


우리는 평생 거울을 보며 살아간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거울, 사회의 기준이라는 거울. 그 거울에 비친 모습이 진짜 나일까? 아니면 그저 왜곡된 반영에 불과할까? 내가 처음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한 나이가 언제였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아마도 딸의 나이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3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여전히 거울 앞에서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사실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어쩌면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은 그 수많은 거울 속에서 진짜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는 과정이다. 그리고 더 아이러니한 것은, 그 진짜 얼굴을 발견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또 다른 거울을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보르헤스의 미로처럼, 우리의 자아 탐색은 끝없는 거울의 회랑을 거닐며 자신의 다양한 모습과 마주하는 여정일수도 있겠다.


다음 날 아침, 딸의 방 책상 위에 작은 메모지를 놓았다. "너의 웃는 눈이 세상에서 가장 예뻐. 사랑해." 그것이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정직한 거울이었다.




딸 아이의 질문은 내게 더 큰 질문을 던졌다. 나는 그녀에게 어떤 거울이 되어주고 있는가? 왜곡된 기준을 반영하는 거울인가, 아니면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비춰주는 거울인가? 물론 완벽한 거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정확하다고 여겨지는 거울조차 빛의 반사각에 따라 이미지를 미세하게 왜곡하는 법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되고 싶은 거울은 분명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도 충분히 빛날 수 있다고 말해주는 거울. 그것이 부모라는 존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일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함께 거울 앞에 서서, 조금 더 진실에 가까운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과정 자체가, 우리가 찾고 있는 진실일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평생 거울과 자아 사이의 긴장된 댄스를 추며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그 댄스의 리듬을 조금 더 우아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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