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마레 May 01. 2024

똑바로 봐야지

배우가 찍고 쓰는 단편영화이야기

씬으로 읽는 단편영화

<입 눈 그리고 빛>




'똑바로 봐야지'


더 이상 기차가 오가지 않는 폐역, 

구둔역에 울리는

미구모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


그 앞에

겁먹은 듯 눈물 고인 남자,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대본리딩
단편영화  <입 눈 그리고 빛> 중에서



이 영화는

쓸모를 다한 입과 눈에 관한 

이야기이다.


구둔역을 아시나요.


1940년부터 영업 개시.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에 위치한 중앙선 철도역.

 2012년 중앙선 선로 이설로 인해

폐역이 되기까지의 역사다.


2023년 1월,

영화팀이 촬영을 하려고 찾은 이곳은

마침 리모델링 공사 중이었다.

감독님은 우리 영화가 구둔역의 모습을 

담는 마지막 팀일 것 같다고 했다.

구둔역(2023년 1월 현재)









올해, 여든이 넘었다.

근대사의 질곡 그대로를 달려온 

구둔역은 미구모녀의 삶과 겹친다.


감히 그리 말할 수 있는 건,

미구와 미구모인 나는

 구둔역을 지키는

성주신이기 때문이다.


감독님의 배역 설명이 그랬다.


성주신이라.

 캐릭터를 잡기가 쉽지는 않겠는걸.


예전의 구둔역을 그리워만 할 뿐.

이제는 쓸모를 다해 거동조차 힘든 나는,

휠체어와 어린 딸 미구에 의지한 채 

하루하루를 버틴다.


게다가 

나와 미구의 입은 이미 쓸모를 다했다.

사람들에게 좀처럼 회자되지 않는.

잊힌 폐역처럼.


그러던 어느 날,

이곳에 한 젊은이가 찾아든다.


용진. 그의 직업은 사진사.

그 역시나

쓸모를 다한 눈을 갖고 있다.


쓸모를 다한

미구모녀의 입, 용진의 눈이라니.


그랬다.

용진은 연신 셔터를 눌러대지만, 

정작 미구모녀에겐 관심이 없다.

 습관적이고 일상적으로 눌러댈 뿐.


이우성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일갈한다.

언제부터 우리는 서로를

카메라와 스마트폰의

작은 렌즈를 통해서만 보려고 하는가.


'똑바로 봐야지'


용진을 향한 미구모녀의 고함처럼,

쓸모를 다한 용진의 눈은 

다시 빛날 수 있을까.

제대로 볼 수 있을까.


그래서 씬 10. 

이 씬은 대단히 중요하다.


 쓸모를 다한 미구모녀가

유일하게 내지른 말이자.


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어의 등장씬이니.


              

S#10 구둔역 표지판 근처 / 낮 

                   

미구모녀가 천천히 용진의 볼을 감싼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미구 모녀를 

번갈아 보는 용진.

 미구모녀가 갑자기 한 명이 되어 

빠르게 교차되어 보이며 

양팔을 활짝 벌린다.


 팔을 들어 안으려 하는 용진에게 

‘짝’ 하고 양손으로 양뺨을 때리는 

미구모녀, 

뺨을 때린 소리가 기차역을 메운다.

 눈에 눈물이 맺히는 용진. 


미구모녀가 천천히 입을 연다. 


미구모녀 

똑! 바!로! 봐! 야! 지!


 
말하는 한 단어마다 얼굴이 

꼴라쥬처럼 조각조각 나뉘어 

미구와 미구모의 

얼굴들이 합쳐진다. 


똑바로 보지 못했던 과거의 

용진의 얼굴들이 

빠르게 바뀌어 보인다. 


눈물이 흐르는 용진의 눈. 

깜빡일 때마다 

카메라의 셔터음이 나온다. 


단편영화 <입 눈 그리고 빛>10 씬 중에서



촬영하기 전,

 여러 번의 준비과정이 필요했다.

쓸모가 없어진 입과 눈 덕분에

 배우님들과의

리허설은 그만큼 중요했다.

촬영에 들어가자

리허설하기를 잘했구나 싶을 만큼 

호흡이 좋았다.


촬영 전, 동선 리허설 중 










1월의 촬영현장은 추웠으나 따뜻했고 동화적이었다.


매 영화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임형태 배우님.


 해맑은 미소로 현장의 분위기를

따뜻하게 해 준 권잎새 배우님.


추운 날씨에도 감정에 몰입해 

매 테이크마다 

극강의 눈물을 흘리는 

전두식 배우님.


그리고,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는

이우성감독님과 현장 스텝들.


매번 나는 현장에서,

 그들에게서, 

배우고 익힌다.


그래서, 현장이 좋다.


구둔역의 성주신이 된 김에

현장을 지키는 성주신이 되어도 볼까나.



입 눈 그리고 빛

Fiction/Color/27'41"

글/연출: 이우성

출연: 전두식, 권잎새, 장마레, 임형태


사회의 현상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동화적으로 풀자하는

반전의 이야기꾼, 이우성 감독의 

영화로운 시절을 응원합니다.




배우가 찍고 쓰는 단편영화이야기

'100명의 마레가 산다'

장마레의 브런치북은 수요일 밤 0시.


이전 02화 일어나 보라니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